김삿갓 (본명. 김병연) 부석사에 들러. 시 한수 남긴 현판
부석사(浮石寺)의 내력
부석사(浮石寺)는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데,
676년(신라 문무왕 16)에 고승 의상조사(義湘祖師)가 창건한 이래
우리나라 화엄종의 총 본산이었으며,
경내에는 천년 고적을 아직까지 고이 간직하고 있으니
목조의 무량수전과 조사당을 비롯해서 석등,
석탑, 본존불상과 조사당의 벽화 및 석조여래좌상 등
다수의 문화재를 보존하고 있는 국보 사찰이다.
부석사의 유래를 살펴보면,
676년(文武王16)에 왕명을 받아 부석사를 창건하고
화엄학을 전교한 의상조사는 625년(眞平王47) 당시
귀족의 가정에 태어나 호화롭게 성장하였다.
그 뒤 그는 서울 황복사에서 삭발하고 중이 되어 입산수도를 했다.
입산한지 8년만에 큰 뜻을 품고 원효대사와 함께 당나라로 향했다.
당나라를 거쳐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까지 가려는 것이었다.
압록강을 건너 요동에 이르러 노숙을 하는 어느날 밤
원효대사는 아주 심한 갈증을 느꼈다.
어두운 곳을 수없이 더듬거리다가 끝내는
바가지 같은 것에 물이 고인 것을 잡아 꿀꺽 꿀꺽 들여 마셨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잠을 깬 원효대사는 깜짝 놀랐다.
물일 마신 그 그릇이 바가지가 아니라 사람의 해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보니 보지 않고 마실 때 그토록 맛있던 물이
알고 보니 토하고 싶도록 비위에 거슬린다는 데 깨달은 바 있어
인도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 귀국한 후 계속 불교연구에 힘썼던 것이다.
그러나 의상조사는 홀로 당나라를 향해 길을 떠났다.
도중에 조사는 고구려 첩자에게 잡혀 고생을 하다가 귀국하여
661년에 다시 당나라의 사신의 배를 타고 당나라로 들어갔다.
양주(陽州)에 이르러서 신병을 얻게 되어 양주성의 수위장인
유지인(劉至仁)의 집에 유숙하며 병을 치료하던 중,
그의 딸 선묘(善妙)라는 처녀가 있어 몇 달이 지나자
어느덧 의상조사에게 연정을 갖게 되었다.
이에 조사는 선묘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 들이지 않고
법도로 대하여 제자로 삼게 되었다.
어느덧 그녀의 정성으로 몸이 완쾌하게 된 조사는
다시 길을 떠나게 되었다.
이때 선묘가 조사에게 청하기를,
"귀국하실 때 이곳을 지나시면
꼭 소녀의 집에 다시 한번 들려주시고 가십시오
"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조사는 이러한 부탁을 쾌히 승낙하고 길을 떠났다.
얼마후 조사는 당나라 서울 장안 남쪽에 있는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에 가서
지엄대사(智嚴大師)의 제자가 되어 수학하던 중
당(唐)이 30만 대군으로 신라를 침범하려는 형세임을 알고
오직 구국일념(救國一念)으로 671년(文武王 11)에 급히 귀국하게 되었다.
조사는 귀로에 양주 선묘의 집에 이르니 마침 출타 중이라
만나지 못하고 가는 것을 전해 달라고 그녀의 부모에게 부탁한 후
다시 길을 재촉하였다. 한편, 선묘는 조사의 귀국 선물로
법의(法衣)를 정성껏 마련하여 손꼽아 기다리던 중,
잠시 집을 떠난 사이에 조사가 여정이 급하여 머물지 못하고
다녀갔다는 이야기를 부모로부터 듣고,
만들어 두었던 선물을 가지고 조사를 쫓아
산동성(山東省)해안에 다다르니 조사가 탄 배는
바다 위에 흰 돛만 보일 뿐이었다.
그녀는 멀어져 가는 돛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섰다가
들고 있던 선물을 바닷물에 던지며 축원하기를 "
진심으로 조사님께 공양하오니 원컨대
이 옷이 조사님께 이르도록 해 주옵소서".
하였더니 때마침 해풍이 크게 일어나면서 던진 선물이
조사가 탄 배 안으로 날아갔다.
이를 보고 있던 선묘가 다시 축원하기를
"이 몸이 용이 되어 조사를 받들어 무사히 귀국하도록 해 주옵소서"
하며 바닷물에 몸을 던지니,
기이하게도 선묘는 바라던 대로 용이 되어
조사의 멀고 험한 귀국의 길을 줄곧 호위하였는지라,
조사는 무사히 귀국하여 나라에 당의 침략 흉계를 고하고 난을 면하게 하였다.
그 후 조사는 왕으로부터 사찰 건립의 명을 받들어
영주시 봉황산에 이르러 지세를 살펴본 즉
화엄종지(華嚴宗旨)를 크게 선양할 수 있는 명산이나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교(異敎)의 무리들 5백여명이
점령하고 있으므로 수차 이들에게
자리를 양보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들이 막무가내로 듣지 아니하여 고심을 하고 있을 때,
용으로 화신한 선묘가 공중에서 바라보니
순리로는 조사의 뜻이 이루어지기 어려움을 짐작하고
법력(法力)을 써 지금의 무량수전 서편에 있는 큰 바위를 공중으로 울렸다
내렸다 3차례나 하였더니 무리들이 겁을 집어 먹고 굴복하였다.
이 자리에 사찰을 건립한 것이 부석사이며
이교도들을 놀라게 하기 위하여 공중에서 세 번이나 떳다는 큰 바위를
부석(浮石)이라 불러 무량수전 서편 암벽 밑에
거대한 모습으로 묵중히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선묘룡(善妙龍)은 석룡(石龍)으로 화하여
무량수전의 자리에 안좌되어 부석사의 수호신이 되려 하매
조사를 크게 감격케 하였다.
지면에서 2척 깊이에 묻혀 있는 48척의 석룡은
그 머리를 무량수전 주불(主佛) 밑에 두고
꼬리는 무량수전 앞 석등까지 펼쳐 있다.
이 석룡은 1967년 5월에 신라 5악 학술조사단이
무량수전 앞 뜰에서 발굴하여 5m가량의 석룡 하반부를
발견하는 데 성공하였다.
비늘 모습까지 아련히 나타나 있는 그 모습이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용과 너무나 흡사하여
천연석으로 볼 수 없는 천연스러운 용이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삼국유사 .구 영주군지 .부석사지
영남의 전설,유증선 저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신 후 원효대사와 헤어지는 의상대사
중국 등주에서의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의 만남
신이한 꿈을 꾼 지엄대사의 문하에 들어가는 의상대사
용이된 선묘낭자의 호위로 무사히 신라로 귀국하는 의상대사
용으로부터 여의보주를 받는 의상대사
낙산사를 창건하는 의상대사
선묘낭자의 도움을 받아 부석사를 창건하는 의상대사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의 사랑
임진왜란 때 원정군으로 참전한 이여송이 우리 나라 명산을 찾아다니면서 인재가 태어날 곳에는 지맥을 많이 끊었다고 하며 그 무렵 이 절의 석룡의 허리가 짤렸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은 신라시대 원효와 요석공주의 이야기처럼 의상과 선묘낭자의 사랑은 애틋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로 우리 가슴에 남아있다.
의상대사를 사모하던 당나라 아가씨 선묘라는 여인이
의상대사를 보호하기 위해 큰 바위가 되어 몸을 던져
위험에서 대사를 구했다는 전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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