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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동읍 지명 및 유래

영월🏕김삿갓부동산 2009. 3. 8. 17:18

  • 연혁
  • 지명유래
  • 인구/경제형태
  • 이장소개
    •  

       

         지명유래

      click. 우리읍은. 지명유래
      마을명
      구래리 태백산 줄기인 민잭산과 고직령에서 흐르는 물이 웃냇뜰(상천평)을 굽이 돌아 농거리에서 어평천과 합류한 후, 심산유곡을 이루면서 칠랑이의 아우라지에서 구래천과 어우러져 남한강 상류인 맛대로 이어진다.
      구래리의 유래는 자장법사(慈藏法師)가 636년(선덕왕 5) 당나라에 들어가 8년간의 고행을 마친 후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가지고 왔다. 자장법사는 이것을 봉안하기 위해 '태백산 갈반지(葛蟠地)'를 찾으려고 상동을 아홉 번이나 다녀갔으므로 이곳을 '구래리(九來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자장은 본구래에서 시작되어 정선으로 뻗은 아름드리 칡넝쿨을 따라 갔는데 지금의 정암사(갈래사, 또는 석남원) 터 눈밭 위에서 푸른 잎에 3송이 붉은 꽃망울을 터뜨린 '삼갈반처(三葛盤處)'의 명당을 찾아 수마노탑을 쌓고 사리를 모셨다고 한다. 구래리는 1923년 일본인들에 의해 상동중석광산이 개광되면서 심산유곡이었던 이곳은 눈부신 발전을 하게되었고, 1973년 7월 1일에는 정선군 신동면 천포리 일부를 흡수하여 구래출장소를 폐지하고 상동읍으로 승격하였다.
      구래는 행정 8개리 504가구에 2,000여명(1992년 기준)의 주민들이 상업과 고랭지 채소재배, 약초, 산채재배 그리고 마늘, 깨, 옥수수 등의 밭농사를 짓고 있다.
      내덕리 윗냇뜰(상천평)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어평천과 합류하여 내평리의 먼내벌로 흐른다. 이곳의 지명 유래는 냇가 언덕 위에 형성된 마을이므로 '내덕'이라 했는데, 후에 한자의 영향으로 '내덕리(內德里)'가 되었다.
      내덕리는 해발 500m의 고지대로 마을 뒤쪽에는 1,267.6m의 매봉산이 있고 구름도 쉬었다 넘는다는 구름재가 있다. 내덕 4리에는 상동읍사무소와 상동 중·고등학교, 보건소 등이 있으며, 행정 6개 리에 300가구 1,126명의 주민들이 구름재, 가삼이, 반정이, 승량이, 주채, 원천(먼냇벌), 칠랑이 등지에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덕구리 본래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지역이었으나 1963년 1월 1일 강원도 땅이었던 울진군이 경상도로 이속되고, 덕구리와 천평리가 영월군 상동면으로 편입되었다.
      땅이름의 유래는 강원도와 경상북도의 경계가 되는 '삼동산'의 큰 언덕 위에 형성된 마을이므로 '덕구리'라 하였다. 덕구리는 '고심골, 굽돌이, 양지말, 음지말, 질가부, 중말 등의 자연부락을 중심으로 75가구 262명(1992년 기준)을 주로 고랭지 채소와 밭농사에 종사하고 있다.
      천평리 본래 경상도 봉화군(奉化郡) 춘양면(春陽面) 땅이었으나 1963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강원도울진군(蔚珍郡)이 경상북도로 이속(移屬)되고 천평리가 영월군 상동읍으로 편입되었다.
      천평리의 원래 지명은 '냇들', '내뜨리'라고 불렀으며 고직령에서 흐르는 물이 마을 가운데를 가로질러 농거리에서 어평천과 합류한다. 이러한 냇물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넓은 들이 펼쳐져 있으므로 '냇들'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곳은 태백산 자락에 자리한 마을로 서쪽은 민백산과 옥녀봉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고직령(高直嶺)이 가로막혀 있는 산상분지로 수만평의 넓은 땅이 있어 고랭지 채소, 감자, 약초 재배 등으로 높은 소득을 올렸으나 1980년 농거리의 농거교 우측에 8231공군부대가 전투기 사격 연습장을 만들면서 천평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던 주민들은 삶의 흔적만 남겨놓은 채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천평리 역시 하동면 와석리와 마찬가지로 이곳이 십승지지(十勝之地)인 『寧越正東上流踪亂』이라고 생각한 「정감록(鄭鑑錄)」에 심취된 비기파 신봉자들이 구한말,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많이 찾아든 곳이다.
      그 외에도 동학교도와 의병들이 몸을 숨기던 곳으로 일제 시대인 1940년에는 가는골에 살던 이낙림(李洛林), 당골(堂谷)의 윤상명(尹尙明), 최익한(崔翼漢), 유형호(柳亨浩) 등 우국지사들이 중심이 되어 주민들과 함께 태백산 천제단에서 『독립기원제(獨立祈願祭)』를 올렸는데 그 중 주동자 20여명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