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면 지명및유래
연혁
고려 의종(1167년)때 밀주(密周)라 불렀으며 밀주(密州)의 청사(廳舍)가 예밀리 밀동 마을 회관 뒤에 있었다.(지금도 이 곳을 원터라고 한다)
연도 |
주요연혁 |
1378년 |
고려 공민왕 21년 군으로 승격, 공민왕 38년(1,395년)에 강원도로 이관 |
1698년 |
조선 숙종때 주(州)를 폐지하고 하동면으로 개칭 |
1914년 |
일정때 행정리를 10개리로 개정 |
1973년 |
사7월 정양리가 영월읍으로 편입되어9개 법정리에 14개 행정리가 되었다 |
1979년 9 월 |
주문 5.6리를 통합하여 법정9개리 행정17개리로 개편 |
1992년11월 |
주문2,3,4,5리를 주문2리로 통합하여 법정9개리 행정14개리로 개편 |
2005년 6월 |
예밀3리를 예밀2리에 통합하여 법정9개리 행정13개리로 개편 |
하동면은 영월군청으로부터 동남쪽으로 15.5km 떨어진 면으로 3도. 4읍. 면과 인접하고 있으며 강원도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해 있고 총 면적은 170,991㎢이며 현재 9개법정리 ,13개 행정리에 47개반 54개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석회암지대로 천연기념물 219호인 고씨굴 및 많은 자연동굴이 남한강의 상류지대에 속한다.
각동리에는 영월엄씨(寧越嚴氏), 진별리에 횡성고씨(橫城高氏), 대야리에는 나주정씨(羅州丁氏), 주문리에는 경주김씨(慶州金氏), 외룡리에 삼척김씨(三陟金氏)들이 대성받이로 살고 있고 품질 좋은 고추, 마늘등이 유명하며, 특히 하동지역에서 생산되는 포도는 석회석지대에서 생산되어 당도가 높고 맛이 좋으며 매년 8월 하순 예밀리 지역에서 포도축제가 열린다 주문리의 옥동광업소, 예밀리의 후천탄광, 진별리의 응봉탄광 등 군소탄광들이 1990년 석탄합리화 사업으로 폐광되어 1964년에는 14,000여명, 1980년 6,479명의 인구가 2005년 12월 기준 830세대 1,747명으로 줄었다. 하동면에는 천년 기념물 219호인 고씨동굴을 비롯하여 대야굴, 용담굴, 내리계곡, 와석리 노루목에는 조선시대 풍류시인 김삿갓(호 蘭皐, 본명 金柄淵) 묘역 및 유적지가 있어 시계절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각동리
지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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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나드리 |
하동면 대야리(大野里) 맛밭과 각동(角洞)으로 이어지는 나루터이다. 1950년 전만 해도 정선과 임계 등지에서 베어낸 통나무로 만들어진 뗏목과 영월 지방 특산물인 담배, 콩, 옥수수 등 잡곡을 실은 돛단배가 남한강 500리 뱃길을 따라 서울 광나루에 도착하는 데는 열흘 이상이 걸렸다.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의 계곡 사이로 흐르는 남한강 물줄기에 돛단배를 띄어놓고 구성진 정선 아라리를 부르는 뱃사공들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고 한다. 뱃사공들은 소금, 광목, 석유 등의 생필품을 가지고 돌아오면서 여울목에서는 줄로 끌어올리고 물이 많은 곳은 노를 저어 올라오며, 곳곳에 있는 작은 포구에서 물건을 팔았다. 각동에서도 보부상이나 도부꾼 뱃사공들이 배를 정박시키고 물건을 팔았는데 이곳은 강물이 굽어 도는 곳으로 배가 드나들었으므로 '뱃나드리'라 하였다. |
진촌(津村) |
일명 중말(중간 마을)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강 건너에 위치한 오룡동(五龍洞)과 두름 마을로 건너가는 나루터가 있으므로 '진촌'이라고 불렀다. |
봉우재 |
두름마을 뒤에 있는 산봉우리로 이 고개를 지나면 영춘면(永春面) 용진리(龍津里)로 간다. 봉우재 밑에는 석성(石城)인 대야산성(大野山城)이 있으므로 삼국시대의 왕검성, 완택산성, 태화산성, 그리고 단양의 온달성을 연결시키는 봉수터(烽燧基)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시대에는 영월에 봉수대(烽燧臺)와 파발마(擺撥馬)제도가 없었다. 봉수제란 밤에는 불로서 보내는 봉(烽)과 낮에는 이리의 똥을 태운 연기로 연락하는 수(燧)를 합친 합성어로 평상시에는 1거(炬), 적이 나타나면 2거(炬), 국경에 가까이 오면 3거(炬), 국경을 넘으면 4거(炬), 전쟁이 벌어지면 5거(炬)로 연락을 하였다. |
물골 |
봉우재 밑에 있는 골짜기로 물이 솟아나는 샘터가 있어서 '물골'이라 부른다. |
두름 |
중말(中村)앞 나루터 건너에 있다. 맛밭에서 가재골을 지나야 갈 수 있는 교통의 오지로 자연 경관이 아름다운 마을이다. 이곳은 예전부터 10가구가 살았는데 가구 수가 조금만 늘어나도 마을에 화재가 나거나 가축이 죽는 등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두름'이란 '생선을 10마리씩 두 줄로 엮은 것'을 말하는데, 이 마을은 10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았으므로 그 지명을 '두름'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언덕위 마을'이라는 뜻인 '두릉'이 '두름'으로 변한 것 같다. |
잿말 |
골마을(골말) 옆으로 예전에 이곳에 큰 기와집이 있었다. 기와집은 재와집으로 소리가 나며 '기와집 마을→재와집 마을→잿마을→잿말'이 되었다. 일설에는 재(둔덕) 위에 있는 마을이라는 얘기도 있다. |
오룡동(五龍洞) |
중말의 강 건너에 있다. 두름으로 가기 전에 있는데 마을 뒤 구슬봉에서 뻗어 내리는 다섯 줄기 산등성이의 맥이 모이는 곳으로 그 형상이 용의 모습과 같다. 다섯 마리의 용이 여의주(如意珠)를 놓고 다투는 오룡쟁주(五龍爭珠)의 명당이 있어 '오룡동(五龍洞)'이라 한다. 1984년까지도 정태섭, 고온영씨의 두 가구가 살았었다. 오룡골 앞에는 '오룡소'가 있다. |
골마을 |
각동리가 소(沼) 형국이라면 골마을은 소가 물을 마시는 입에 해당하는 움푹 들어간 골짜기이므로 '골마을'이라고 한다. |
새터(新基) |
골말과 샘골 사이에 위치하며 광산 개발로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사택을 짓고 살았던 곳이므로 '새터(新基)'라 한다. |
괴목(槐木) |
샘골과 새터 사이에 있다. 마을에 큰 괴목(槐木, 느티나무)이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앞에는 커다란 거북바위(龜岩)가 있어 '구암'이라고도 했다. |
각동리 돌널무덤(石棺墓) |
괴목 서남쪽의 용구미소 위쪽에 있었다. 이곳은 태화산 줄기가 가로막혀 겨울에도 북풍이 없는 따뜻한 곳으로 토질이 비옥하고 남한강의 맑은 물이 흐르는 곳이므로 선사시대(先史時代)인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했으며, 분지인 영월지방에서 유일하게 감나무가 많이 자라는 고장이다. 돌널무덤은 일제 시대에 원용성(元容成)씨의 구릉진 밭에서 발굴되었는데, 무덤은 두께 7∼10cm되는 자연석으로 쌓았으며, 너비 130cm, 길이 175cm의 덮개돌로 덮혀 있었다. 이 덮개석은 마을 공동 우물의 다리로 이용되었으나 새마을운동때 덮개석 자체를 시멘트로 발라버렸다. 출토된 유물은 간돌칼 1점과 간돌화살촉 8점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용구미소 |
괴목과 샘골 사이에 있다. 용구미소는 깊고 구미가 져서 명주실 한 꾸리를 다 풀어도 끝이 닿지 않는데, 옛날에 형제 장수가 용(이무기)을 잡으려고 들어갔다가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곳은 사시사철 낚시꾼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잉어, 붕어, 뱀장어 등이 많이 잡혔는데 영춘(永春) 군관교 위에 소수력 발전소가 만들어지면서 어로(漁路)를 설치하지 않아 고기가 올라오지 못하므로 낚시꾼들이 많이 줄었다. |
각동리
지명 |
지명유래 |
기전동(基田洞) 큰터 |
외룡리의 삽짝모랭이에서 내리로 들어가는 어귀에 있는 마을이다. 일명 '대기동(大基洞)' 또는 '큰터마을'이라고 한다. |
중평(中坪) |
큰터와 지동(池洞)사이에 넓게 펼쳐진 들이 있는 마을로 그 위치는 내리의 중간이 되므로 '중평'이라 한다. 중평과 지동 사이의 논, 밭을 '중들(中野)'이라 하는데 그위치는 내리분교와 마을회관이 있는 곳이다. |
돌솟대 |
지동의 버스 종점 위쪽인 바른골 어귀로 옛날 절이 있었던 곳이다. 이곳 마을 안산(案山)인 용바우골의 지세(地勢)와 마을을 향하여 흘러내리는 계곡의 경사가 너무 심하여 풍수학적으로 지동 마을에 해(害)를 끼치고 위협하는 형상이므로 그 기(氣)를 누르기 위해 돌로 조산(造山)을 만들어 마을을 보호하였다고 한다. 이곳 돌탑 꼭대기에는 오리처럼 생긴 돌을 세워 놓았는데 새의 머리가 용바우골을 향하고 있으므로 일명 '돌솟대'라고 부르고 있는데 우리의 전통적인 토속 신앙의 일종이다. 그 건너편에는 내리서낭당과 당숲이 있다. |
살개골 |
중들 밑에 있으며, 그 지형이 디딜방아의 살개처럼 생겼으므로 '살개골'이라 부르는데 삼도봉으로 가는 작은 살개골과 미사리로 넘어가는 큰 살개골이 있다. 일설에는 살구나무가 많아서 '살구골→살개골' 또는 '향곡(香谷)'이라 부른다는 얘기도 있다. |
우당골 |
용바우골 동쪽으로 대추나무가 많고, 폭포가 있는 골짜기이다. 여기에서 강원, 경북, 충청도의 3도가 접하는 삼도봉으로 갈 수 있다. 근처에는 풀이 무성하여 나무로 담장을 만들고 소를 방목하는 사람들이 있다. 옛날 소머리를 제물로 바치고 산신제를 지냈던 산신당이 계곡 우측에 있었으므로 '우당골'이라 하였다. |
뒷골 |
바른골을 지나 동북쪽으로 길게 뚫린 골짜기이다. 녹전리와의 경계인 목우산을 지나 응고개로 질러가는 지름길이 있었다. 지동마을 뒤쪽으로 난 골짜기이므로 '뒷골'이라 한다. |
구절터 |
소야치에서 상동읍(上東邑) 내덕리(內德里)의 밤산골로 넘어가는 산자락에 있었던 절터이다. 옛날 이곳에 큰 절을 지으려고 대목수가 대패질을 하는데 여러 마리의 까치가 울어대면서 대패밥을 입에 물고 회암(回岩)으로 날아갔다. 회암이 좋은 절터인가 생각되어 그곳에다 다시 공사를 하는데 이번에도 또 대패밥을 물고 어디론가 가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스님이(의상대사) 이 까치를 따라가보니 지금의 부석사(浮石寺) 절터에다 대패밥을 수북하게 쌓아 놓았던 것이다. 스님은 이곳이 명당임을 믿고 부석사를 지었으며 지금도 내리 사람들은 부석사가 세 번째 만에 지어진 사찰이므로 『3부석』이라는 얘기를 한다. 그때 의상대사(義湘大師)가 부석사를 짓는 중 큰 너럭 바위가 있어서 걱정을 하고 있는데 그 너럭 바위들이 저절로 공중으로 떠 하나는 내리의 회암(回岩)으로 날아오고 나머지 하나는 그 뒷산으로 옮겨졌다는 전설이 있다 얼마 전만 해도 내리에서는 경북 영풍군(榮豊郡) 부석장(浮石場)까지 걸어 다녔으며, 내리분교 학생들은 회암의 곱돌재를 넘어 부석사(浮石寺)까지 도보로 수학여행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
원골 |
대야치와 조제 사이에 있었다. 태백, 영주, 풍기, 봉화로 가는 교통의 중심지로 가벼운 느릎나무로 만든 지게에다 소금이나 절인 생선을 지고 다니면서 곡식과 바꾸어 가던 선질꾼이나 행인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던 목로주점과 같은 작은 행려원(行旅院)이 있었던 곳이다. |
장자터 |
원골과 가리지기 사이에 있다. 옛날 큰 부자가 이곳에 살았는데 주변의 농토가 모두 이 사람의 소유였다고 한다. 가을 추수철이 되면 곡식가리를 쌓아 놓고 가난한 이웃을 위하여 잔치를 벌일 줄도 아는 인심이 후한 부자가 있었던 곳이므로 '장자터'라 부른다. 이곳에 큰 묘가 있는데 지금도 그 근처 밭에서는 사기 조각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
가리지기 |
원골 밑에 있는 마을로 여섯 가구가 살았는데 지금은 폐촌이 되었다. 장자터와 원골쪽으로 갈라지는 큰길 밑에 있는 마을이므로 '가라지기→가리지기'로 변하였다. |
조제(鳥堤) |
원골 남쪽에 있는 마을로 내리 마을회관에서 이곳까지는 10km가 되는데 임씨(林氏)들의 집성촌(集姓村)으로 자연 경관이 뛰어난 곳이다. 지명(地名)의 유래는 임씨(林氏)들이 많이 사는 동네이므로 수풀(林)이 우거졌다는 뜻이 되고, 수풀이 있으면 새(鳥)가 있어야 하므로 마을 이름을 '조제'라 하였다. |
절골 |
조제(鳥堤)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작은 암자가 있었다. 지금도 절터에서는 기와장이 발굴되고 있다. |
박달골 |
조제(鳥堤) 조조에서 경북 봉화로 넘어가는 박달제 밑에 있는 마을이다. 목질(木質)이 단단하여 수레바퀴, 빗, 다듬이, 방망이를 만드는데 이용되는 박달나무가 많은 골짜기이다. |
회암(回岩) |
지동(池洞)의 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이곳에는 큰 명당이 있었다 한다. 의상(義相)대사가 676년에 문무왕(文武王)의 명을 받고 절터를 찾으러 다니다가 이곳에다 절을 지으려고 했는데, 까치가 대패밥을 물고 영주군 부석면 북지리(北枝里)로 날아갔으므로 그곳에다 부석사를 지었다고 한다. |
회암(回岩) |
지동(池洞)의 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이곳에는 큰 명당이 있었다 한다. 의상(義相)대사가 676년에 문무왕(文武王)의 명을 받고 절터를 찾으러 다니다가 이곳에다 절을 지으려고 했는데, 까치가 대패밥을 물고 영주군 부석면 북지리(北枝里)로 날아갔으므로 그곳에다 부석사를 지었다고 한다. 부석사(浮石寺)를 건립할 명당에 큰 너럭바위가 있어 고민하던 중, 이 바위가 저절로 공중에서 떠서 옮겨간 뒤 그 곳에다 절을 건립하고 이름을 부석사라 하였다. 이때 큰 바위 하나가 이곳으로 날아왔기 때문에 마을의 지명을 '회암(回岩)'이라고 부르고 바위를 '구들바우'라 하고 바위가 넘어온 고개를 '회암령(回岩嶺)'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
딸깍소 |
소야치(작은모랭이) 남쪽에 있는 소(沼)이다. 장마 때 큰 돌이 굴러내려 부딪치는 소리가 딸각딸각거린다고 해서 '딸각소'라 한다. 일설에는 이곳에 '초병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 절에 나이 많은 스님이 표주박을 매달아 놓고 소(沼)의 물을 퍼먹었는데 그 때 표주박이 벼랑에 부딪히는 소리가 딸깍딸깍하여 '딸깍소'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
칠룡동(七龍洞) |
벌때(峰垈) 남쪽에 있으며, 마을 앞에 있는 용소(龍沼)에서 일곱 마리의 용이 승천(昇天)하였으므로 '칠룡동'이라고 한다. 한때 30여 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폐촌이 되었다. 칠룡골에는 송이와 함께 산속 깊은 곳 벼랑 위에서 자라는 엽상체식물인 석이(石耳)가 많이 나는 곳으로 석이는 한방재나 음식의 모양을 내는 고명으로 사용된다. 칠용동 남쪽은 경북 부석면과 경계가 되는 선달산(先達山, ,236.0m)이 있다. |
칠룡폭포, 소(沼) |
칠룡동에 있는 폭포와 소이다. 옛날에는 물이 깊어서 명주실 한 꾸리를 다 풀어도 모자랐다는 얘기와,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
은곡(隱谷) |
조제 남쪽에 있는 마을로 입구는 좁고 안쪽이 넓은 골짜기이다. 조선 말기 나라가 어지러울 때 어떤 현인(賢人)이 가족을 이끌고 십승지지(十勝之地)인 이곳에 와서 은둔(隱遁)생활을 하였던 곳이므로 '은곡'이라고 불렀다. 일설에는 산나물을 뜯으러 갔던 새댁이 이곳에서 애기를 낳았으므로 '응아골'이라고 한다는 얘기도 있다. |
은곡(隱谷) |
조제 남쪽에 있는 마을로 입구는 좁고 안쪽이 넓은 골짜기이다. 조선 말기 나라가 어지러울 때 어떤 현인(賢人)이 가족을 이끌고 십승지지(十勝之地)인 이곳에 와서 은둔(隱遁)생활을 하였던 곳이므로 '은곡'이라고 불렀다. 일설에는 산나물을 뜯으러 갔던 새댁이 이곳에서 애기를 낳았으므로 '응아골'이라고 한다는 얘기도 있다. |
대야리
지명 |
지명유래 |
맛밭(麻田) |
각동으로 건너는 나루터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은 강원과 충북의 접경 지역으로 60∼70년전만 해도 상선이 어물, 소금 등의 생활 필수품과 곡식을 물물 교환하던 곳이다. 이곳 지명의 유래는 충북 영춘면(永春面)과 경계를 이루는 마대산(馬代山, 1,052.2m)이 뒤에 있고, 역(驛)에 지급하던 '마전(馬田)'이 있었으므로 '마전(馬田)→맛밭(麻田)'으로 변하였다. 고려시대 이웃 마을인 정양리에는 평구도(平丘道) 소속의 '정양역(正陽驛)'이 있었다. |
가재골(可在洞) |
맛밭 남쪽으로, 조선 후기 사회가 혼란해지자 정감록에 심취한 평안도에 살던 박씨(朴氏)들이 십승지(十勝地)를 찾아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이 사람들이 처음 터를 잡은 곳은 지금도 그 지명을 '텃골'이라고 부르며, 한때는 40여 가구가 넘었으나 지금은 6가구가 살고 있다. |
가재골(可在洞) |
맛밭 남쪽으로, 조선 후기 사회가 혼란해지자 정감록에 심취한 평안도에 살던 박씨(朴氏)들이 십승지(十勝地)를 찾아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이 사람들이 처음 터를 잡은 곳은 지금도 그 지명을 '텃골'이라고 부르며, 한때는 40여 가구가 넘었으나 지금은 6가구가 살고 있다. 이곳의 지명 유래는 길흉이나 화복을 예언한 비기서(秘記書)에 심취한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면서 풍수학적으로 '가히 살아남을 만한 곳이다.'는 의미에서 '가재동(可在洞)'이라고 하였다. 일설에는 본동과 떨어진 '가장자리 마을'이므로 '가재골'이라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
텃골 |
가재동의 개척자로 십승지지(十勝之地)를 찾아온 평안도 박씨(朴氏)들이 처음 터를 잡은 곳이다. |
민골 |
가재골의 남쪽 맛대로 넘어가는 목너미재 밑에 있다. 주위의 산세에 비하여 평평한 지대이므로 '민골'이라고 하는데, 이곳을 지나면 영춘면 푸새골로 간다. |
대야산성(大野山城) |
대야리의 본동과 가재골로 넘어가는 큰 재 정상에 있다. 삼국 시대 남한강 뱃길을 지키기 위한 성으로 온달성과 왕검성 사이에 축조되었다. |
영전이재(嶺轉峙) |
가재골과 충북 영춘의 푸새골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큰 고개(嶺)를 넘어(轉)간다고 하여 '영전이재'라는 이름이 붙었다. |
구멍바위 |
맛밭에서 대야리로 가는 998번 지방도 좌측 벼랑으로 여자의 음부(陰部)와 같은 큰 구멍이 뚫려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구멍바위' 또는 '바람바위'라고 하는데 동네 총각들이 막대기를 가지고 그 구멍을 찌르고 장난을 치면 대야리 본동 마을처녀들이 바람이 났다고 한다. 그 후 마을 어른들이 1970년대에 시멘트로 구멍바위를 막아버렸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
대야본동(大野本洞 |
맛밭 대야교 우측인 사태밭 서낭당이 있는 마을이다. 대야리의 중심 마을로 '대야, 본말, 댓들'이라 하는데 이는 마을 앞에 큰 들판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사태밭 조산당 |
대야본동 입구에 있는 서낭당이다. 병자년(1936) 홍수 때 마대계곡의 산사태로 큰 흙더미가 떠내려와서 쌓였다. 마을 사라들은 건너편의 구멍바위의 음기(陰氣) 때문에 본동의 양기(陽氣)가 위축되는 것을 걱정하여 이 흙덩이로 조산(造山)을 만들고 서낭당을 세워 음기를 눌렀다. 그후부터 이곳을 '사태밭 조산당'이라 불렀다. 지금도 마을에서는 주과포를 준비하여 매년 당고사를 올리고 있는데 제주는 생기복덕을 맞추어 동네 사람들 중에서 선출한다. |
모퉁이 |
각동초등학교 대야분교를 지나 덕내(큰내)로 가는 모퉁이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는 바람이 세게 부는 곳으로 정월 대보름에 연날리기 시합을 했으며, 주위의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물이 좋아여름 한철 모퉁이 마을인 각동 2교 밑에는 많은 피서객들이 찾는다. 이곳은 연을 날리며 홍취를 돋우던 곳 이라 하여 '연흥(鳶興)'이라고도 한다. |
덕내(德川) |
모퉁이 맞은편으로는 논물을 대기 위하여 보(洑)를 막은 덕내보와 큰 느티나무가 있는 동네이다. 이 마을은 강릉 김씨(江陵金氏)의 집성촌(集姓村)으로 옥동리와 경계가 되는데 마을 앞으로 큰 옥동천이 흐르므로 '덕내'라고 하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덕내(德川)'로 변했다. '덕'은 '크다'는 뜻이다. |
칠성백이/td>
| 덕내 북쪽 수리봉 밑에 있다. 절벽이 무너져 움푹 파인 곳으로 칠원성군(七元星君)에게 자식을 점지해 달라고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므로 '칠성백이'라고 부른다. |
대야굴 |
대야리 덕내 북쪽의 수리봉 병창 밑에 있는 길이 400m의 석회 동굴로 강원도 기념물 32호로 지정되었다. 폭 5m, 높이가 10m인 이 굴은 종유석, 석순, 석주 등이 있으며 27종의 생물이 살고 있으나 관리부족으로 많은 종유석들이 훼손되었다. |
수리봉 |
덕내 북쪽에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수리'란 '높은 곳'을 뜻하는데 사람의 머리 윗부분도 정수리라고 한다. 즉 우리말로 가장 높은 산봉우리를 '수리메' 또는 '수리봉'이라고 불렀다. 수리봉은 다시 매봉산, 응봉산, 매화봉 이라는 이름으로 변했다. |
상암(象岩) |
맛대(馬岱)의 유명한 의원이었던 엄상일(嚴相一)의 집 앞에 있는 큰 바위이다. 엄의원은 젊어서부터 산공부를 하여 의술을 터득한 후 가난한 환자들을 많이 고친 분으로 그의 처방은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나무 열매나 풀 뿌리 등으로 조제한 약이지만 고치지 못하는 병이 없을 정도로 그의 명성은 널리 퍼졌다. 맛대는 산이 험하여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서 가축을 물어갔다. 엄 의원이 집 앞에 있는 바위에 가로 15cm, 세로 20cm 크기의 『상암(象岩), 乙酉年 五月(1909년)』이라는 글을 새기자 그 후부터는 가축의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지금도 상암(코끼리 바위)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하동면 대야리 맛대 마을에 남아 있다. |
자작목이 |
마대 북쪽 골짜기에 있는 고개이다. 자작목이는 곡우(穀雨)때 나무에 흠을 내어 수액을 받아먹는 고로쇠나무와 자작나무가 많았으므로 '자작목이'라고 불렀다. 이 고개를 넘으면 하동면 옥동리 칠금이로 간다. 24절기의 하나인 청명(淸明)과 입하(立夏) 사이인 곡우때 받아먹는 고로쇠나무의 수액은 위장병에 좋다고 한다. |
방울재 |
마대에서 충북 영춘면(永春面) 동대리(東大里)의 베틀 마을과 점터로 가는 고개이다. 예전에 충청도와 강원도를 넘나들며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말이나 노새 등에 짐을 싣고 이 고개를 많이 넘어 다녔는데 그 때 목에 매달았던 방울이 울렸으므로 '방울재'라 하였다. 일설에는 방울처럼 동그란 산봉우리로 난 고개길이라는 얘기도 있다. |
예밀리
지명 |
지명유래 |
밀동(密洞) |
옥동(玉洞)에서 예밀교를 건너 첫 번째 있는 마을로 고려 시대에 밀주(密州)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은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는 난리를 피하면서 적을 칠 수 있는 요새이므로 임시로 고을을 옮기고 '밀주(密州)'라 하였으며 지금도 '밀주' 또는 '밀동'이라고 한다. 천민집단 거주지로 수공업에 종사하던 성미탄소(省彌呑所)가 있었는데, 조선 전기에 이르러 해체되었다. |
원터 |
예밀리 밀동의 마을 회관 근처이다.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지금도 이곳을 '고을원터'라고 부르고 있는데, 옛날 밀주의 청사터였고 그 뒤에는 조선시대 세곡(稅穀)을 보관하던 두창(杜倉)이 있었다. 그러나 이곳 역시 출장을 가는 관리나 상인 길손들에게 숙식을 제공해주던 원(院)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
샘골(泉谷 |
밀골 북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맑은 샘물이 있어서 '샘골' 또는 '새암골'이라고 하는데 샘골 물은 밀동 마을 저지대의 간이상수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
삼봉산 |
샘골 뒤에 있는 산으로 봉우리 셋이 나란히 서 있어서 '삼봉산'이라고 하는데 이곳의 늙은 소나무는 삼봉노송(三峰老松)이라 하여 예밀 8경에 속한다. |
창터(倉基) |
밀동(密洞)에 있다. 조선 시대의 전세(田稅)나 세곡(稅穀)을 보관하는 창고인 두창(杜倉)이 있었는데, 지금도 이곳에서는 기왓장이 발견되고 있다. 예밀리(禮密里) 밀동(密洞)의 창터(倉基)에 있었던 두창(杜倉)에서는 하동면 지역의 세곡(稅穀)을 징수하여 보관하였다. 이 때 보관한 세곡은 영월부(寧越付)의 읍창(邑倉), 중동면(中東面) 이목리(梨木里)에 있었던 동창(東倉), 남면(南面)의 서창(西倉)에 보관했던 전세(田稅)나 세곡(稅穀)과 함께 배를 이용한 조운(漕運)으로 원주 부론면의 섬강 북쪽 언덕에 있었던 흥원창(興原倉)으로 옮겼다. 이곳에 보관되었던 세곡은 영월, 원주, 평창, 정선, 횡성 다섯 고을의 세곡과 함께 남한강의 뱃길을 따라 여주, 양평, 노량진을 거쳐 용산의 경창(군자감 별영창)에 세곡을 부렸다. |
고지기재 |
밀골에서 998번 지방도를 따라 와석리로 넘어가는 해발 300m의 험한 고개였으나 1980년에 도로가 개통되었으며, 차량이 많고 경치가 아름답다. 이 재를 넘으면 태백, 동해로 이른다. 와석리(臥石里)로 넘어가는 고개이므로 '와석재'라는 이정표를 세웠으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 고개 본래의 지명은 '고지기재'로 밀동(密洞)의 창터(倉基)에 있었던 두창(杜倉)의 세곡(稅穀)을 지키는 창고지기인 고지기들이 이 고개를 넘어 다녔다고 해서 생겨난 지명이다. 가족들과의 상봉을 기다리며 든돌에서 서당을 열고 평생을 혼자 살다간 새풍 선생이란 분의 묘가 있다. 그는 통일이 되면 와석리로 찾아 올 자식을 맞아들이기 위해 자신이 죽으면 와석리 입구인 고지기재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했다고 한다. (br/> 원래의 고지기재는 밀골 배터거리에서 산 능선을 따라 올라가다가 998번 도로와 연결되어 찬물나드리의 도일바위로 내려갔다. |
점터(店基) |
긴재와 장자터 사이에 있다. 옛날에 옹기 그릇을 굽던 점(店)이 있었으므로 '점터'라 한다. 지금도 옹기 조각이 출토되고 있는데 옹기를 만들 때 쓰는 진흙을 '즘'이라고 했는데 '즘을 파내던 곳'이라는 뜻도 된다. |
장자터 |
점터 위쪽에 있는 집터이다. 옛날에 마음씨 착한 사람이 부모의 묘를 잘 써서 큰 부자가 되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영월군 하동면 예밀리(禮密里)는 예미촌과 밀동 마을의 첫 자를 각각 따 생겨난 지명으로 이 마을의 망경대산 남쪽 산기슭에는 큰 미등(큰 묘둥지)이라는 곳이 있으며 마을의 북쪽에는 '장자(長者)터'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옛날 이 마을에 가난하지만 마음씨 착하고 효자로 소문난 조씨 성을 가진 사람이 병든 늙은 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그 당시는 황포 돛대를 단 배가 한양에서 물건을 가득 싣고 남한강의 물길을 따라 하동면 각동리 나루터와 금봉연(金鳳淵)인 합수거리를 지나 덕포리까지 와서 물건을 팔고 가던 때였다. 이 예밀리에 살던 조서방은 각동 나루터에서 소금을 사가지고 지게에 지고는 소금치(재렴치)고개를 넘어 연하리 석항, 정선 등으로 장사를 다녔는데 워낙 사람이 순한데다 욕심이 없어서 매 번 손해를 보는 터라 장사는 얼마 못 가서 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사람은 제대로 생긴 반듯한 논밭 하나 없는 형편인지라 당장 끼니 거리도 문제가 되고 병중에 계시는 아버지께 약 한첩 사드릴 형편도 못되었다. 이 부부는 온 마을을 다니며 품을 팔아 생계를 어렵게 유지하며 그 와중에서도 병드신 아버님께는 꼭 고기 반찬을 마련하여 극진하게 대접하였다. "세상에 조서방 부부처럼 극진한 사람들은 없을 거야! 모르긴해도 저들 부부는 오래지 않아 큰 복을 받을 거야." 하며 마을 사람들은 조서방 부부를 칭찬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병환은 날로 심해갔고 그들의 생활도 더 나아지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n 부부는 조금도 실망하지 않고 눈이 녹기 시작하는 봄부터 산에 올라가 화전을 개간하고 거름을 주어 정성스럽게 농사를 지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인이 점심으로 나물죽을 쑤어 함지박에 이고 남편이 일하는 만경대의 화전 밭으로 가보니 남편이 벗어놓은 지게 옆에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남편과 함께 급히 가보니 초라한 모습의 늙은 스님이 쓰러져 있었다. 이 노승은 산중에서 길을 잃고 허기져서 헤매다가 나무 그늘 아래의 지게 옆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던 것이다. 이들 부부는 늙은 스님에게 먼저 물을 먹인 후 에도 팽개친 채 스님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와서 나물죽일 망정 성의껏 대접하며 온갖 정성을 다 쏟았다. 덕분에 건강을 되찾은 늙은 스님은 크게 감동을 받았다. "세상에 이렇게 착하고 어진 사람들이 있다니. 저 젊은 부부에게 무언가 꼭 보답을 해야지!" 하면서 지금의 큰 미등(큰 묘둥지) 자리에다 당대에 발복하여 큰 부자가 될 수 있는 장풍득수(藏風得水)형국을 갖춘 명당 중의 명당을 정해주고는 병환에 계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곳에다 묘를 쓰라고 일러주고 떠나갔다 그후 오랜 병환으로 고생하시던 아버지는 두 부부의 극진한 정성에도 불구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들 부부는 늙은 스님께서 정해준 장풍득수(藏風得水)형국의 명당에다 묘를 썼으며 정성을 다하여 삼년 상을 마친 후, 예전에 장사를 하던 마을을 찾아다니면서 물건을 팔았다. "역시 구관이 명관이야! 요즘 물건을 파는 최서방은 저울눈까지 속이며 이익을 취하는데, 조서방은 사람을 속일줄도 모르고 마음이 고진 이야. 그뿐인가! 조서방 부부는 효자로 소문이 난 사람이니 우리 마을 사람들은 이제부터 그 사람의 물건을 사주기로 하세!" 민심은 천심이란 말이 있듯이 인근 마을의 사람들까지 조서방 부부를 도와주었다. 그후 조서방 부부는 장사도 잘되고 자식들이 모두 훌륭하게 자라서 마침내 온 근방에 소문이 날 정도의 큰 부자가 되었다. 먼 훗날 그의 후손들이 묘역을 크게 조성함으로써 이곳의 지명은 큰미등이라 불리게 되었고 또한 지금도 이곳 예밀리 사람들은 이들 부부가 소금 장사를 위해 넘어 다니던 고개를 '소금치(재렴치)'로, 또 그들이 살았던 집터를 '장자(長者)터'라고 불러오고 있다. |
옥동리
지명 |
지명유래 |
옥동리(玉洞里) |
하동의 면 소재지이다. 예밀리(禮密里) 밀동(密洞)은 1167년 고려 시대에는 밀주(密州)의 청사(廳舍)가 있었던 곳이며, 그 당시 죄인들을 가두던 감옥이 옥동리의 옥동중학교 자리에 있었다. 옥(獄)이 있었던 마을이므로 '옥동(獄洞)'이라고 했으나 어감(語感)이 좋지 않다고 하여 '獄洞→玉洞'으로 고쳤다. 현재는 130가구에 433명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옥동중학교와, 하동지서, 하동농협, 하동우체국 등의 행정 관서가 있다. 옥동리에는 구한말 의병장으로 명성을 날렸던 삼척 김씨 백우(白愚) 김상태(金尙台)장군의 사당이 있었으나 관리 소흘로 없어졌고 1993년 그 자리에 『순의비』를 세워 그의 높은 공적을 기리고 있다 |
날파리 장광 |
옥동 송어장 앞의 넓은 돌장광으로 예비군 훈련장이 있다. 하루살이와 날파리가 많아서 생겨난 지명으로 이곳은 장마가 지면 많은 수석인(壽石人)들이 하동 옥석(玉石)을 탐석하는 수석산지로도 유명하다. 강가에는 넓은 암반이 있는데 이것을 마당바위라고 부른다. |
칠금이(七錦) |
옥동 송어장이 있는 옥동교를 지나 남쪽으로 길게 뻗은 마을이다. 칠금이 뒤에 칠칠 바우가 있는데 옛날 비가 개인 후 이 바위에서 일곱 색깔의 무지개가 생겼으므로 칠금이라고 불렀다. 대성광업소라는 석회광산이 있으며, 그곳을 지나면 '맛대'로 갈 수 있다. |
물무리골 |
칠금이 뒤에 있는 골짜기로 많은 양의 샘이 솟아나므로 '물무리골'이라고 부르는데, 옥동 사람들이 간이 상수원으로 이용한다. |
백골(柏谷) |
옥동 마을 뒤에 있는 골짜기로 원래의 지명은 배골(背谷)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배골→백골'로 와전되었다. 일설에는 이곳에 잣나무(柏木)가 많아 백골(柏谷)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
옥골(玉谷) |
옥동중학교 운동장 부근을 말하는데, 운동장을 만들 때 옥터의 기초석이 발견되었다. 고려 시대 밀동(密洞)에 밀주(密州)의 관청이 있을 때 이곳에다 감옥을 만들어 죄인을 가두었으므로 '옥골(獄谷)'이라고 불렀다. 그 후 어감(語感)이 좋지 않으므로 '옥골(玉谷)'로 고쳤다. |
뱃나들이(舟津) |
옥동초등학교 부근이다. 지금은 예밀교(禮密橋)가 설치되어 있으나 예전에는 옥동에서 배를 타고 예밀리로 건너가는 나루터가 있어서 생겨난 이름이다. |
윗골폭포 |
옥동 강 건너 덕가산(상여산)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여름철이 되면 덕가산에서 흐르는 물이 폭포수를 이루며 떨어져 옥동천으로 흘러간다. |
외룡리
지명 |
지명유래 |
직실(直谷) |
와석에서 외룡리로 들어가는 입구로 외룡초등학교가 있는 곳이다. 동네가 길고 곧게 뻗어 있어서 '곧은골, 직실' 또는 '외직리(外直里'라 하였다. '곡(谷)'은 이두식 표기인 '실'로 읽히기 때문에 '직실'이라고 하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곳에는 농업에 종사하는 천민집단 거주지인 직곡부곡(直谷部谷)이 있었으며 '육말연(陸末淵)'이라는 큰 연못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육말연은 용연을 말하는 것이다. |
숲거리 |
소미원(小味院)으로 가는 입구에 있다. 느릅나무와 느티나무숲이 우거졌으며, 예전에는 황새와 두루미가 많이 서식하였으나 1972년 수해와 태풍으로 나무가 부러지고 부엉이가 황새 새끼를 잡아먹어서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옛날에는 소미원이 경상도의 춘양장(春陽場)과 소천장(小川場)으로 가는 큰 길이었으며, 행인이나 보부상(褓負商)들이 이곳의 마방집과 주막집에서 묵어 갔다. 또한 오래된 느티나무가 많다. |
열재 |
직실 남쪽 음짓말 뒤에 있는 고개로 이곳을 넘으면 와석리의 노루목과 조촌(趙村)을 지나 의풍으로 간다. 예전에는 칡가루로 녹말을 만들어 남자는 지게에 지고 여자들은 머리에 이고서 좁은 이 고개를 넘어 의풍장(儀豊場)에서 쌀이나 농기구, 생필품으로 바꾸었다. 돌아올 때는 줄(열)을 지어 좁은 고갯길을 넘어 다녔는데 새벽 여섯 시에 출발하여 장을 보고 돌아오면 밤 아홉시가 되었다 한다. |
음지뜸 |
외룡리의 남쪽으로 열재와 배나무골이 있는 곳으로 햇볕이 잘 들지 않는 음지쪽 마을이다. '뜸'이란 큰 마을 가까이에 따로 몇 집씩 모여 사는 '작은 동네'를 말한다. |
소미원골(小味院谷) |
직실 숲에서 소미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골짜기이므로 '소미원골'이라 한다. 경치가 좋고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으로 31번 국도가 개통되기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던 교통의 요충지로, 입구인 숲거리에는 큰 주막집이 있었다. |
반정이(半程里) |
숲터거리에서 소미원으로 가는 경계이다. 즉 하동면 와석리와 중동면 화원리의 중간 지점이므로 '반정이'라 한다. |
창터거리 |
하동면 예밀리에 있었던 두창(杜倉)으로 운반하는 세곡을 임시로 보관하던 창고가 있어서 붙여진 지명으로 외룡초등학교 뒤쪽에 있었다. |
용연(龍淵) |
용담소(龍潭沼)가 있는 마을로 옛날 이 연못에서 용마(龍馬)가 나왔다는 전설이 있으며, 지금도 큰 바위 위에는 용마의 발자국이 새겨져 있다. 이곳에서 나온 용마가 든돌(거석리)에서 태어난 장수가 죽은 것을 알고 3일 동안 울부짖으며 뛰어다니다가 죽자와인리(臥人里) 들모랭이에 묘를 만들어 주었다는 얘기가 전한다. |
용마암(龍馬岩) |
용담소 가운데에 있는 큰 바위이다. 바위에서 용마가 나왔으므로 '용마암'이라고 한다. |
용연서낭당(龍淵城皇堂) |
용담소의 용마암 위에 있었다. 최영 장군의 화상과 신위(神位)를 모시던 서낭당으로 새마을운동 때 마을에서 불태워버렸다. 전에는 정월 대보름날 동네 사람들이 돼지를 잡고 삼색 실과와 시루떡을 준비하여 당고사(堂告祀)를 올렸다.. |
구보(舊洑) |
음짓들에 있는 논에다 물을 대기 위하여 막은 보(洑)이다. 제비바위 앞에 새로이 산보를 막음으로 구보라고 부르게 되었다. |
배나무골 |
음지말 서남쪽으로 구보 앞에 있다. 마을 입구에 큰 돌배나무 한 그루가 있었으므로 '배나무골'이라 불렀다.. |
삽짝모랭이 |
외룡리에서 내리로 들어가는 삼거리의 칡가루 공장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위치상 사립문에 해당되는 마을 입구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삽짝모랭이'라고 한다. 삽짝'은 '싸리나무 같은 잡목을 엮어서 만든 문짝'을 말하고, '모랭이'는 산모퉁이를 휘어 돌아가는 '모퉁이'의 영월 사투리이다. |
갈미산 |
외룡리의 북서쪽에 있는 작은 산봉우리이다. 그 형상이 비가 올 때 갓 위에 덮어쓰는 갈모와 비슷하게 생겼으므로 '갈모산→갈미산'이라 불렀다.. |
거북바위 |
제비바위 마을의 신보 위쪽에 있었다. 옛날 이 마을에 큰 부자가 있었는데 심성이 착하여 찾아오는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러나 손님들의 뒤치닥거리에 지친 안주인은 손님들이 오는 것을 귀찮게 생각하여 스님을 모셔다가 "스님 우리 집에 손님이 찾아오지 않도록 해 주실 수 없습니까?"라고 말하였다. 그 스님이 생각할 때는 주인 내외의 관상이 좋은 것도 아니고 집터를 둘러봐도 결코 부자가 될 명당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대문 앞을 내다보니 집앞으로 흐르는 개울가에 큰 돌거북이 입을 크게 벌리고 집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 저 거북이가 이 집을 큰 부자로 만들어 주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자 안주인에게 "주인마님, 이 돌거북의 주둥이를 깨뜨리면 손님들이 찾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집안 살림은 점차 줄어들 것이니 생각을 잘해서 결정하십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버렸다. 그 다음날 부인은 남편 몰래 도끼를 가지고 거북바위의 머리를 치자 입이 떨어져 나가면서 붉은 피가 솟아났다. 그때부터 그 부자집은 망해버리고 손님들의 발걸음도 끊기게 되었다고 한다. 이 거북바위는 몇 년 전만 해도 제비마을에 있었는데 998번 지방도를 확포장할 때 없어졌다고 한다. |
아우라지 |
삽짝모랭이 남쪽 계곡으로 내리천과 녹전천이 합쳐지는 곳이므로 '아우라지'라 한다. 이곳은 구보(舊洑)가 있어 외룡리 음지마을 일대의 논물을 대기도 한다. 아우라지는 두 군데의 물이 어우러지는 곳(합쳐지는 곳)이므로 '어우러지기→아우라지기→아우라지'로 변하였다. |
절골(寺谷) |
문둥이집골 동쪽으로 전에 절이 있었던 골짜기이다 |
석이산(石耳山) |
제비바위 마을 북서쪽인 구름다리골을 지나 운교산(雲橋山)에 높게 솟은 벼랑을 말한다. 이곳에는 큰 잔치집의 국수나 음식 등에 고명으로 쓰거나 한방재로 쓰이는 엽상체식물인 석이가 많이 나는 바위가 있으므로 '석이산'이라 한다. |
석이산(石耳山) |
제비바위 마을 북서쪽인 구름다리골을 지나 운교산(雲橋山)에 높게 솟은 벼랑을 말한다. 이곳에는 큰 잔치집의 국수나 음식 등에 고명으로 쓰거나 한방재로 쓰이는 엽상체식물인 석이가 많이 나는 바위가 있으므로 '석이산'이라 한다. |
주문리
지명 |
지명유래 |
주실(注谷) |
주문리 검암산 밑의 중심 마을이므로 '주실'이라 한다. 영월 동쪽 40리 김삿갓상회가 있는 주석분교 개울 건너편에 있다. 마을이 따뜻한 남향으로 앉아 가을철이면 감이 익어 마을 전체가 붉게 보인다. 주실 마을은 경주 김씨들의 집성촌으로 1907년 7월 26일 찬물나드리의 도일바위전투에서 패한 일본인들이 주실 마을 주민들을 살육, 방화하여 기성희(金性熙)의 귀와 팔을 자르고 김도희(道熙), 김치희(致熙), 김일희(日熙), 김교성(敎聲), 김정운(正雲)등을 살육하였다. |
주실나들이 |
와석리(와인리)에서 주실의 본마을로 건너가는 냇물이다. 지금은 다리가 있어서 자동차도 건너다닐 수 있으나, 예전에는 동네 사람들이 동발나무로 교각을 세우고 덕우(걸치는 나무)로 고정시킨 다음 청솔가지와 진흙으로 다리를 덮은 '뚝다리'를 설치하여 한겨울에 이용하였다. 사람들만 건너 다니는 곳은 널다리(통나무를 톱으로 켜서 널빤지로 만든 후 철사로 묶어서 사용하는 다리)를 이용했으나 사람과 소가 다니는 곳은 뚝다리를 놓았다. 그러나 뚝다리가 없었을 때는 주실 사람들이 볼일을 보기 위해 얕은 냇물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다니던 곳이므로 '주실나들이'라 한다. |
솟대백이 진사터 |
주실 본마을에 있는 큰 기와집터로 경주 김씨 집안에서 2代에 걸쳐 진사(노진사, 소진사)가 났다고 한다. 이 집터는 지금도 '진사터'라고 불리고 있으며 백여 년이 지난 고가(古家)가 남아있다. 진사터 앞에는(김정도씨 집부근) 큰 솟대를 세워서 진사가 이 마을에 살고 있다는 것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솟대 꼭대기에는 새와 함께 바람개비를 달아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람개비 돌아가는 소리 때문이 이 솟대를 쉽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
독바우 |
주실 서쪽인 고지기재 위쪽에 있는 바위로 모양이 항아리처럼 생겼으므로 '독바우'라고 부른다. |
새실골 |
독바우 위에 있는 골짜기로 그 우측은 큰 새실골, 좌측은 작은 새실골이라 한다. 이곳은 새로이 화전을 일구는 사람들이 살았으므로 '새실골'이라 한다. '실'은 '골짜기 마을'을 의미한다.. |
샘골(泉谷) |
주실마을 뒷골짜기로 약 3km쯤 가면 차고 맑은 물이 솟아나는 샘이 있으므로 '샘골'이라 한다. 이곳을 지나면 모운동으로 갈 수 있다. |
벽골(壁谷) |
주실 북동쪽에 있는 골짜기 마을로 골의 동·서쪽이 벽처럼 깎아지른 듯하고 푸른 계곡이 흐르는 곳이므로 '벽골'이라고 한다. 모운과 예미촌, 그리고 싸리재를 넘어 화원리로 가는 자동차 도로가 있다. 나주 정시(羅州丁氏) 25세 손으로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낙향한 영월 정씨들의 증조인 봉선대부 정극실(후에 丁居實로 개칭)의 묘가 이곳에 있었으나 실묘되었다. 31세손 세강(世康)이 집안에 큰 장군이 난다는 풍수가의 말을 듣고 선조의 산소 위인 장군대 좌형국(將軍大座形局)에 부친의 묘를 쓰려하자 문중에서 반대하였다. 이에 세강은 330여년 전인 1660년에 영월읍 삼옥리(사모개)로 이주했는데 그의 후손들이 먹골, 벌말, 섭사 등에 터를 잡고 있다. 지금도 이곳은 장군대좌형국의 묘터를 찾기 위해 지관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는 곳이다. |
독짓골(독지미) |
벽골 뒤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 이곳에서는 중배가 불룩하고 운두가 높은 질그릇과 오지그릇을 만들었으므로 '독짓골'이라 불렀다. |
벼름이(비림이) |
벽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모운의 옥동광업소로 가는 길이다. 예전에는 여섯 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폐촌이 되었다. 물이 맑고 경치가 좋았으나 옥동탄광의 폐석이 흘러내려 자연 경관을 많이 훼손시켰다. 이곳 골짜기에는 참나무가 무성하여 농기구를 참숯(참나무숲)에 달구어 두드린 후 날을 세우고 쇠를 벼름질하는 벼름깐(대장깐)이 있었으므로 '벼름이'라고 한다. 일설에는 산골짜기에 참나무가 무성하므로 '나무성할 비(揷)'자와 '수풀 림(林)'자를 써서 '비림'이라 한다는 얘기도 있다. |
참나무 서낭당 |
벼름이에 있는 서낭당으로 세 이름이나 되는 큰 참나무가 당목(堂木)으로 있었다. 예전에는 매년 대보름에 당고사를 올렸으며 『城皇之神位』라는 위패가 모셔져 있다. |
독주골(獨住谷) |
벼름이 동쪽인 삼막골로 가는 골짜기이다. 외딴 화전(火田) 지역인 이곳에 한 가구가 살았으므로 '독주골'이라고 불렀다. |
삼막골(麻幕谷) |
주실 동쪽으로 예전에 이곳에는 대마(大麻)를 많이 심은 밭이 있었다. 삼베를 짜는 데 이용되는 대마, 저마, 아마, 황마를 통틀어서 삼이라 하는데 삼밭의 삼을 짜기 위하여 쳐 놓았던 막(幕)이 있었던 골짜기이므로 '삼막골'이라 하였다. |
무릎대, 무릉대 |
미사리(未死里) 맞은편으로 흐르는 옥동천(玉洞川) 건너이다 전에는 세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도자기 원료를 채굴하는 三寶세라믹스광산이 있다. 옥동천이 흘러내려 얕은 내를 이루어 사람들이 옷을 무릎까지 걷고 건너다녔으므로 '무릎대'라 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무릉대'로 변하였다. 가을철에는 둑다리를 놓았으나 지금은 광산에서 잠수교를 설치하였다. |
싸리재 |
모운 북쪽에 있으며 마을 뒤에는 해발 1,087.9m의 망경대산이 뻗어내려 중동면 화원리(禾院里)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싸리나무가 많아서 '싸리재'라고 부른다는 얘기도 있으나, 이 고갯길이 망경대 산봉우리 사이로 이어져 있으므로 '샛재→사이재(間峙)→싸리재'로 된 땅이름으로 생각된다 |
모운(會雲) |
모운은 벽골 북쪽의 높은 분지로 망경대산 밑에 있다. 비가 오고 난 후 안개와 구름이 많이 끼는 마을이므로 '모운'이라 한다. 옥동광업소와 모운초등학교가 있는 광산도시였으나, 석탄합리화 사업으로 인한 광산의 폐광과 더불어 황폐화되었다. 극장터인 옥광회관자리는 늪지대인 연못을 메운 곳으로 흐린 날이면 늘 구름에 싸여 있다. |
진별리
지명 |
지명유래 |
진별리(津別里) |
진별리는 남한강 상류에 있는 마을로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나루두둑'이라고 부르던 '진구리(津邱里)'와 '베리골'이라 부르던 '별이곡(別梨谷)'에서 '진'자와 '별'자를 따서 '진별리'라 부르게 되었다. 진구리는 옛날 소금, 생선 등을 판매하던 나룻배가 드나들던 나루터가 있었으며 그 건너편에는 국민관광지로 지정된 고씨동굴이 있다. 진별리는 꽃절, 고습어구, 가리골, 베리골, 진구리, 돌앞개, 지푼개, 당골, 양주터 등의 자연부락에 50여가구 175명의 주민들이 주로 농업에 종사하며 생활하고 있다. |
베리골(別梨谷) |
정양리(正陽里)와 진별리(津別里)의 경계인 각시바위(모처녀바위)에서 고씨굴 쪽으로 약 500m쯤 가다가 좌측으로 들어가 있는 마을이다. 골짜기가 매우 깊고 벼리(베리)밑에 있으므로 '벼리골→베리골'이라고 불렀다. 베리골을 한자식으로 표기하여 '별이골(別梨谷)'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시대의 권섭(權燮, 1641∼1721년)은 「영삼별곡(寧三別曲)」이라는 기행가사에서 별이골(베리골)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별이실 외딴 마을 해는 어이 쉬 넘거니 <봉당(封堂)의 자리 보아 더새고 가자스라 밤중에는 사립밧기 긴 바람 니러나며 삿기곰 큰 호랑이 목가라 우는 소리 산골이 울혀이셔 기염도 흘난할샤 칼빼며 겻희노코 이 밤을 계유새와 ---- 권섭(權燮)은 숙종 때 사람으로 호는 옥소(玉所) 또는 백취옹(百趣翁)이고 자는 조원(調元)이라 했다. 「영삼별곡」은 그가 34세 숙종 30년(1704)에 삼척 부사로 있던 외조부 이세필(李世弼)을 찾아왔다가 영월, 삼척 일대의 명승지를 답사하면서 지은 기행가사로 그의 초고문집인 「옥소고(玉所稿)」에 실려 있다. 권섭은 44세때 충북 청풍으로 이사하여 살면서 진경산수화를 그리는 정선과 교류했으며, 54세에 제천 문암동으로 이주하여 89세로 세상을 뜰때까지 50여권의 문집을 남겼다. |
고습어구(高濕谷口) |
영월읍 정양리와 하동면 진별리의 경계이 모처녀바위를 지나 고씨동굴로 가는 595번 지방도의 좌측인 미래가든이 있는 곳이다. 베리골로 들어가는 골짜기 어구로 항상 물이 고여 있고 축축한 기운이 있다. |
용담굴(龍潭窟) |
진별리 베리골 왼쪽의 8부능선에 있으며, 강원도 기념물 23호로 지정되었다. 이 동굴은 고생대(古生代)의 석회암층으로 길이는 350m에 이르는 수직굴로 내부의 온도는 계절에 관계없이 15∼18℃가 된다. 4개의 큰 광장만 수십만년 전에 생성된 석순과 종유석들이 있고 30여 종의 생물이 살고 있으며 그 동안 학계에서 많은 학술조사가 있었다. |
텃말(基村) |
베리골의 중심 마을이다. 이 골짜기에 들어온 사람들이 가장 먼저 터를 잡고 살았다 하여 '텃마을'이라 했으며, 지금도 마을에는 작은 연못 주위로 10여가구가 살고 있다. 이 베리골은 1970년대 화전 정리를 하기 전 만해도 70여 가구가 살았던 큰 마을이었다. 화전민들은 골짜기마다 흩어져 살았는데 마을의 모임이나 민속놀이는 이곳 텃말에서 이루어졌다. |
곰배나무골 |
텃말 북쪽에 있다. 흙덩이를 깨뜨리는 농기구 곰배(곰방메의 사투리)를 만드는 물푸레나무가 이곳에 많았으므로 불리어진 이름이다. |
곶절개(화절치) |
예전에 절이 있었던 곳으로 돌앞개 북동쪽에 있다. 봄이 되면 진달래와 철쭉꽃이 피어 동네 어린이들이 참꽃을 꺾으러 왔으므로 '꽃절개→곶절개'라고 불렀다. 지금으로부터 30∼40년전 만해도 보리고개가 있어 산에 올라가 참꽃(진달래)을 따먹거나 칡, 찔레순, 목화 열매를 먹으면서 허기진 배를 채우는 일이 허다하였다. 옛날에는 참꽃밭에 가면 참꽃문둥이가 잡아먹는다 하여 여러 명이 떼를 지어 다니기도 하였다. |
늪둔지 |
곶절개 위에 있는데 항상 물이 고여있는 늪이 있는 언덕이므로 '늪둔치→늪둔지'라고 불렀다. 이곳은 1만여 평의 넓은 들녘으로 초지를 조성하여 목장으로도 이용되었다 |
새양개 |
지푼개 동쪽에 있는 양지바른 실개천이다. '새'는 '동(東)쪽'을 뜻하고 '양(陽)'은 '양지(陽地)바른 곳'을, '개'는 '시냇물이 흐르는 곳'을 의미한다. 즉, 양지쪽에 있는 냇가라는 뜻이다. |
양주터 |
둔지머리와 들곤이 사이에 있다. 「정감록」에 의하면 큰 난리와 굶주림에서 살아날 수 있는 십승지(十勝地)의 일곱째는 『영월 정동쪽 상류인데 난리가 나면 종적을 감출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수염이 없는 자가 먼저 들어오면 안된다. 寧越正東上流 可臧亂踪 無髮者先則否』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기묘사화 때 큰 화를 당한 조광조(趙光組)의 후손들이 공주로 낙향했다가 임진 왜란때 평창 주진을 거쳐 베리골과 명생동에 정착하였다. 한양 조씨 후손들이 십승지를 찾아서 하동면 와석리 조촌(趙村)에 터를 잡고 마을 입구를 미사리(未死里)라 하고, 그 안에 있는 마을은 명생동(命生洞)이라고 불렀다. 그후 후손들이 이 골짜기에서 계속 살았으므로 그 곳의 지명도 조촌(趙村, 조씨들의 집단거주지)이라고 불렀고 와룡초등학교 와석분교가 있다. 즉 한양조씨 17세손인 홍필(弘必, 1707∼1777년)이 처음으로 하동면에 터를 잡고 살다가 죽었는데 그의 묘는 부인 인동 장씨와 함께 진별리 베리골에 묻혔으므로 '양주터'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 지금도 이 산소는 후손들에 의해서 잘 관리되고 있다. |
매봉재 |
베리골에서 연하리 계사동(연하폭포)으로 넘는 고개이다. 매봉산에 있는 고개이므로 '매봉재'라 하는데 산나물이 많이 나는 곳이다. '매봉'이란 그 주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뫼봉→매봉'이라는 뜻의 '매'가 '수리매'로 변하여 '수리봉, 수리산, 매봉산'으로 불리어 지게 되었다. |
진구리(津邱里) |
원 지명은 나루두둑이다. 고씨굴 앞에 있는 마을로 나루터 둔덕에 있는 마을이므로 '나루두둑'이라고 했다. 이곳 지형이 배 형국이므로 옛날부터 이 마을에서는 우물을 파지 못하게 하였다. 즉 우물을 파는 것은 배 밑바닥을 파서 구멍을 내는 격이므로 배가 침몰하면 마을에 큰 재앙이 생긴다고 믿고 있었다. 전에 어느 집에서 우물을 팠는데 송아지 한 마리가 빠져 죽자 그 우물을 메웠다고 한다. 이곳의 식수는 논이골의 간이상수원이 이용된다. |
고씨굴(高氏窟) |
나루두둑(진별리)의 강 건너에 있는 굴이다. 원래는 '노리곡석굴(魯里谷石窟)'이라 했으나 의병장 고종원(高宗遠) 일가가 임진왜란 때 피난을 했으므로 '고씨동굴'이라 하였다. 4억년의 신비를 자랑하는 이 굴은 호수, 폭포수, 광장 등과 24여종의 미생물이 서식하며 1985년부터 국민관광지로 개발되었다. 고씨굴에는 횡성 고씨(고종원 일가)들이 피난을 하면서 밥을 짓기 위해 불을 때어 그을린 흔적과 솥을 걸었던 자리가 남아 있다. |
다랭이골 |
구마봉 밑에 있는데 진별리의 공동묘지로 이용되고 있다. 구마봉이 말(馬)의 머리부분이면 이곳은 다리에 해당되는 위치이므로 '다랭이골'이라 한다. |
시막골(侍幕谷) |
진별초등학교 뒤에있는 골짜기이다. 영월의 의병장 고종원(高宗遠)의 어머니인 엄씨(마대 엄의 집안에서 출가)의 산소가 있다. 엄씨는 1589년 11월 20일에 작고했는데 며느리인 창령 조씨가 이곳에다 막(幕)을 치고 3년동안 시묘(侍墓)를 살았으므로 '시막골'이란 지명이 생겼다. 이 마을에 살던 고만성(高萬星, 88년도 83세)씨가 이곳에서 오소리굴을 발견하여 땅을 파다 불을 지핀 흔적이 있는 구들장을 발견했는데 이곳이 바로 시막터였다고 한다. 그리고 산소 앞에 있는 큰 느티나무는 그때 심은 것이라 한다. 고씨굴 앞 도로 가에 있었던 열녀각(烈女閣)은 1972년 8월 홍수로 없어졌다. |
부들골 |
시막골 위쪽에 있는 골짜기로 습한 곳에서 잘 자라며 잎과 줄기로 방석이나 부채를 만들 수 있는 부들이라는 풀이 많아서 '부들골' 또는 '부드라이골'이라 부른다. |
울여울(鳴灘) |
고씨동굴과 각동교(角洞)사이에 있다. 여울 건너편으로 깎아지른 듯한 층암 절벽 위에 큰 노송나무가 남한강 줄기를 굽어보고 있으며, 그 밑으로 긴 여울이 흐르는데 여울물 흐르는 소리가 크게 울리어 '울 鳴'자와 '여울 灘'자를 써서 '鳴灘' 즉 '울여울'이라 하였다. 「寧越付邑誌」에 『鳴灘 在虎灘下二十里水急 울여울은 범여울 20리 아래에 있으며, 물살이 급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핏골 |
울여울 동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로 의병과 왜구들이 싸울 때 핏물이 흘렀던 곳이므로 '핏골'이라 한다. 임진왜란 때 왜병이 침략하자 진별리에 살던 고종원(高宗遠), 고종길(高宗吉), 고종경(高宗慶) 형제가 영월을 지키기 위해 각 지역에 통문(通文)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였다. 문무(文武)에 뛰어난 고종경이 의병장이 되었는데, 강원도 감사였던 유영길(柳永吉)의 명으로 병사 5백명을 거느리고 원주 흥원창(興原倉)으로 진군하다 왜적을 두려워하는 많은 병사들이 도망치는 바람에 고종경은 도착일을 지키지 못하고 처형이 되었다. 그 후고종경의 억울함이 밝혀져 유영길은 파면되고 참판 강신(姜紳)이 감사로 임명되었다. 고종원의 가족은 왜구가 진별리까지 쳐들어오자 노리곡석굴(魯里谷石窟)로 피난했는데, 그 당시 불을 지펴 밥을 지은 흔적이 지금도 고씨굴에 남아있다. 왜구들은 고씨 가족이 피난하는 굴 앞에 나무를 쌓아놓고 불을 질렀으며 고종원, 종길 형제는 굴 밖으로 나와 왜구의 포로가 되고 고종원의 부인 조씨(曹氏)는 굴 안의 소(沼)에 투신했다. 포로가 된 고종원 형제는 1592년 8월 17일 영월읍 봉서루에 평창군수 권두문(權斗文)과 사산감역(四山監役) 이사악(李士岳), 평창 중방(中房) 고산영(高産英) 등과 함께 감금되었다. 이들은 주천 빙허루에서 하루를 지내고 산림을 지나 원주로 압송되어 목책 속에 수용되었으나 9월 초하루 밤이 깊어지고 소낙비와 번개 소리가 요란한 틈을 타서 목책의 기둥을 뽑아버리고 권군수 일행과 함께 탈출하였다. 그러나 수렁에 맨발로 단구역(丹丘驛)에 다다른 이들은 뒤를 추격하는 왜구에게 붙잡혀 아우 종길은 살해되고 종원은 목숨을 부지하여 힘들게 진별리로 돌아온 사연이 고종원의 일기인 「기천록(紀天錄)」에 기록되어 있다. 그 당시 진구리(津邱里)의 핏골을 중심으로 남한강 계곡은 왜구들의 살육과 방화로 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
와석리[臥石里, Waseok-ri]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에 있는 리(里)이다. 어래산 끝나락에 자리한 농촌이다. 이곳은 사람이 편안히 누워서 자연을 벗삼아 어질게 살수 있는 살기 좋은 마을이라는 뜻에서 '와인리(臥人里)'라 하였으며 후에 와석리가 되었다. 자연부락으로는 두릉골, 와인리, 골어구, 든돌, 싸릿골, 노루목, 미사리, 골말, 젖동개, 조촌 등이 있다. 해발 1,063.6m의 어래산(御來山) 줄기로 강원도, 충청북도, 경상북도의 삼도가 접하는 접경 지역인 삼도봉이 있다.
와인리(臥仁里)
고지기재 밑에 있는 도일바위(屠日岩) 건너편인 두릉골, 들모랭이, 골어구 등을 '와인리'라 한다. 이곳은 사람이 편안히 누워서 자연을 벗삼아 어질게 살수 있는 살기 좋은 마을이라는 뜻에서 '와인리(臥人里)'라 하였다.
두릉골(杜陵谷)
와석송어장 뒤쪽의 높은 언덕(두릉) 위에 위치한 마을이므로 두릉골이라 한다. 한때는 10여 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2가구가 살고 있다. 오대본서구니(마당굼이)에 있는 산신당의 뒷재를 넘으면 김삿갓의 묘가 있는 노루목과 그의 집터가 있는 어둔(於屯), 선락동(仙樂洞)으로 가는 길이 있었다.
찬물나드리
고지기재 밑에 있는 도일바위(屠日岩)에서 두릉동으로 건너가는 개울물을 말한다. 이곳은 두릉골 옻물샘에서 흘러내리는 12℃정도의 찬 물이 흘러내리므로 이를 이용하여 송어를 키우는 와석송어장이 있다. 배를 타고 건너는 곳을 나루라고 하고, '나드리(나들)'란 무릎을 걷어올리고 건너는 곳'을 지칭한다. 이곳은 뼈가 시릴 정도의 차가운 시냇물이 굽어 도는 얕은 곳이므로 '찬물나드리'라 한다.
도일바위(屠日岩)
두릉동의 와석송어장 앞으로 흐르는 찬물나드리 건너편에 있는 바위이다. 1907년 일본에 의한 고종 황제 강제퇴위와 군대 해산으로 일어난 정미의병장(丁未義兵長)인 이강년, 김상태(金尙台) 의병장(하동면 옥동리 거주)이 거느리는 의병들이 도일바위(일본인들을 도륙한 바위)에서 찬물나드리를 건너오는 일본 헌병대 수십 명을 사살하고 고지기재를 넘어 밀골로 숨어 버렸다. 일본인들은 찬물나드리 위에 있는 경주 김씨 집성촌인 주실마을로 들어와 주민들이 의병들과 내통하였다 하여 마을을 불태우고 서당 훈장인 김성희(金性熙)의 귀와 팔을 자르고 김도희(道熙), 김치희(致熙), 김일희(日熙), 김교성(敎聲), 김정운(正雲) 등을 살육하였으므로 주실 마을은 같은 날(1907년 7월 26일, 음력) 제사를 지내는 집이 많았다.
김상태(金尙台) 의병장은 그 후에도 신출귀몰하는 작전으로 영월, 단양, 영주, 풍기 등지에서 일본 수비대를 격퇴시켰다. 1911년 6월 14일 소백산 기슭인 풍기군 단산면 광암리에서 현상금에 눈이 먼 심복 우중수(禹中守)의 제보로 영주 수비대장인 종편겸(宗片謙)에게 체포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단식 끝에 옥사하였다. 정부에서는 1963년 김상태 의병장에게 『건국 공로훈장』을 추서하였다. 하동면 옥동리에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순의사를 건립하였으나 없어지고 영월군에서 1993년 그 자리에 『순의비』를 세웠다.
아기장수 무덤
와석송어장 건너편 998번 지방도 밑에 있는 도일바위(屠日岩) 근처에 있다. 든돌에서 태어난 아기장수를 죽여 이곳에다 묻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가라치
고지기재를 지나는 998번 지방도가 개통되기 전에는 예밀리에서 가르대를 건넌 다음 가라치를 넘고 와석송어장이 있는 두릉동 앞의 찬물나드리를 지나서 와석리로 다녔다. '가라치'란 '갈라지는 길목' 또는 '산줄기가 나누어지는 곳(목)'을 말한다.
황새바위
와석리(와인리) 마을 뒷산에 있다. 산봉우리에 큰 암석이 마을 쪽으로 길게 뻗어있으므로 '황새바위'라 한다.
말구리재
가치산의 7부 능선에 있는 고개로 예전에 와석리에서 옥동 쪽으로 가는 사람들은 이 길을 이용하였다. 이 고개는 뼝대 사이로 난 좁고 험한 고갯길로 아래 쪽은 푸른 옥동천이 흐르는데 옛날 외룡리 용담에서 나온 용마가 주인 장수를 찾으며 울부짖다가 이곳에서 굴러 죽었으므로 '말구리재'라 한다는 전설도 있다. 그러나 '말구리재'란 말이 '말이구를 정도의 험하고 위험한 고개'를 의미하는 뜻이다.
도깨비 밭
옛날 들모랭이에서 행인들을 상대로 주막을 하는 과부가 있었는데 그 과부는 얼굴이 예쁘고 행실도 밝아서 뭇사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늙은 홀아비 도깨비가 이 여자가 마음에 들어 사람으로 변하여 찾아와서 자기와 결혼을 해주면 한 가지 소원을 꼭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이 때만 해도 들모랭이는 수풀이 우거진 못쓰는 벌판이었으므로 밭으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였더니 하루아침에 그 넓은 땅이 옥토(玉土)로 변하였다.
그후부터 밤만 되면 도깨비가 나타나 결혼을 하자고 못살게 굴었다. 이 과부는 큰 백말을 잡은 뒤 그 피를 집 주위에다 소금과 함께 뿌렸더니 그후부터 도깨비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들모랭이 말무덤
옛날 든돌(擧石里)에 사는 늙은 부부가 자식을 얻기 위하여 100일 치성을 드린 후에 아들을 낳았다. 이 애기의 겨드랑이에는 날개가 달려 있고 태어난지 사흘만에 실강에 올라가 놀고 하였다. 이 아기장수가 장차 나라의 큰 역적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죽인 다음 고지기재 밑 도일바위 근처에 묻었다. 이 아기장수가 죽은지 며칠 후에 이웃 마을인 외룡리의 용담(龍潭)에서 용마(龍馬)가 나와 사흘 동안이나 울부짖다가 죽었다.
그 무덤을 용마무덤이라 하여 와석리(옛 지명 와인리)의 들모랭이에 묻었다. 그 후 주민들은 이 무덤에 매년 용마제를 지냈으며 병자년 홍수 때 유실된 것을 동민들이 복구를 했으나 1972년 수해 때 묘가 없어졌다. 장수가 태어난 든돌에는 지금도 장수터라는 곳이 있다.
골어구(谷口)
와석분교 동쪽에 있다. 충북(忠北) 단양군 영춘면(永春面) 의풍리(儀豊里)와 경상북도 영풍군(榮豊郡) 부석면(浮石面) 남대리(南大里)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이 김삿갓의 생가가 있었던 어둔 선락동(仙樂洞) 계곡과 합류하여 이곳 골 어구로 흘러내린다. 주위의 경관이 수려하고 기암절벽 사이로 흐르는 맑은 물이 이곳에서는 양 갈래로 흐르는데 여름 한철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든돌로 가는 골짜기 입구이므로 '골어구'라 한다.
든돌(거석리. 擧石里)
와석분교 뒤쪽에서 김삿갓 묘가 있는 노루목으로 가는 골어귀와 싸리골(쌀골)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든돌에서 태어난 아기장수가 힘 자랑을 하기 위해 집채만한 바위를 들어서 작은바위 위에다 올려놓았으므로 '든돌' 또는 '든바우'라는 지명이 생겼다. 그 후 순수한 우리말 땅이름인 든돌이 한자식 표기법인 '거석리'로 변하였으며 난리가 있을때는 마을사람들이 이 바위 밑에서 피난도 했으나 그동안 수차례의 수해와 도로공사로 많이 묻혔다.
봉우재
와인리의 골어구에서 든돌로 가는 도로 우측에 있다. 예전에 이곳에서 봉화를 올렸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봉우재'란 '산봉우리에 난 고개'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인 것 같다.
장수터
든돌교(擧石橋) 서쪽으로, 옛날 자식이 없는 부부가 치성을 드린 후 장수를 낳았던 곳이므로 '장수터'라 부르고 있다. 외룡리의 용담에서는 용마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절양지(寺陽地)
박달골 끝자락의 양지 바른 언덕 위에 있다. 전에 절(寺)이 있었으므로 '절양지'라 한다. 지금은 서울 사람의 별장의 들어섰는데 집터가 세다고 한다. 일명 절골 이라고도 한다. 이 절의 재목은 보덕사를 지을 때 모두 옮겨갔다고 한다.
칠칠바위
싸리골에 사는 어떤 사람이 밤늦게 마실을 다녀오다가 호랑이에게 물려갔다. 이 얘기를 들은 사람들이 솔가지불을 해들고 찾아보니 너럭바위에서 사람을 뜯어먹고 있었는데 피가 철철 흐르므로 이때부터 '칠칠바위'라 불렀다고 한다.
싸리골(미동, 米洞)
각시소 위쪽에 있다. 거석리(든돌, 擧石里)에서는 유일하게 20여 마지기의 논이 있어 쌀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골짜기이므로 '쌀골'이라고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싸리골'로 변하였다. 이곳은 높은 산악 지대 분지로 지형상 찬 공기가 쌓여 냉기류를 형성하는 지형임에도 불구하고 찬 공기가 불어오지 않아 농사가 잘되고 가축이 잘 자라는 마을이다. 한때는 10여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두 가구가 살고 있다.
이곳 역시 조선시대 정감록(鄭鑑錄)에 심취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피난하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십승지(十勝地)를 찾아왔으며 십승지는 어지러운 세상에 난을 피할 수 있으며 흉년 또한 들지 않는 곳으로 곡식의 종자를 양백(陽白)에서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들이 찾는 십승지는 『寧越正東上流 可臧亂踪 無髮者先入則否, 영월 정동쪽 상류로 어지러운 세상에 종적을 감출 만한 곳이나 수염 없는 자가 먼저 들어오면 안된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지금도 이곳에는 서울대 지리학과 최창조(崔昌祚)교수가 일년에 몇 번씩 찾아 와서 김기천 씨 집에 묵으면서 하동면 일대의 풍수지리를 연구하여 T.V에 소개하기도 한다.
대밭나드리
곡골에서 김삿갓묘가 있는 노루목으로 가는 계곡 우측에 있다. 이곳은 야트막한 산자락으로 흰 눈이 쌓인 겨울철에도 늘 푸른 산죽(山竹)밭과 실개천이 있는 곳으로 '대밭나드리' 라고 한다. 옛날부터 산죽이 나는 곳은 명당이라는 얘기가 있다.
노루목
싸리골에서 곡골, 대밭나드리를 지나 와석리와 충북 단양군 영춘면의풍리(義豊里)와 경계가 되는 마을이다. 지금도 노루목에 사는 아이들은 매일 40분 이상씩 걸어서 충북 땅인 의풍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널 노루목에서 의풍 노루목으로 넘어가는 산마루 정상에 바위 두 개가 노루뿔처럼 솟아 있으므로 이 마을의 이름을 '노루목'이라고 한다. 경치가 아름답고 살기 좋은 산촌(山村)으로 어둔 입구에 있는 시선(詩仙) 난고(蘭皐) 김삿갓의 묘는 박용국 선생(영월 향토사 연구가)이 찾아내 성역화 하였다.
김삿갓 묘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에 있다. 마대산 줄기가 버드나무 가지처럼 흘러내리는 유지앵소형(柳枝鶯巢形)의 명당으로 태백산과 소백산이 이어지는 양백지간(兩白之間)에 자리잡고 있다. 마대산 자락인 어둔과 선락동에서 흐르는 냇물을 경계로 충북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남·동쪽으로는 널노루목의 풍요로운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시선(詩仙) 난고(蘭皐) 김삿갓의 묘는 버드나무 가지에 지은 꾀꼬리집 형상의 명당으로 안동 김씨(安東 金氏) 대종회 휴암공파 회장인 김천한(金天漢)씨가 비석을 세우고 매년 10월 1일 후손들이 찾아와 시제를 지내고 있다.
어둔(於屯)
김삿갓의 묘가 있는 노루목 성황당에서 서북쪽으로 30분쯤 들어가면 김삿갓이 살던 집터가 있었던 곳이다. 어둔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마대산에서 흐르는 계곡 사이로 좁은 돌길이 나 있는데, 그 우측은 선락동(仙樂洞)이고 좌측으로 가면 김삿갓이 살던 집터가 나온다. 어둔에는 지금 산(山)공부를 하는 젊은 여자가 혼자 살고 있다. 이곳은 태백산(太白山)과 소백산(小白山)의 양백간(兩白間)으로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의 3도 접경 지역이다.
조선 명종 때 풍수(風水), 천문(天文)에 도통한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도 의풍(儀豊)을 가리켜 피장처(避藏處)로서 천하에 둘도 없는 명당이라고 극찬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좁은 골짜기로 해가 일찍 지고 어두운 곳이므로 '어둔'이라 불렀다고 한다.
미사리(未死里)
와석리 골 어구와 와석 주유소를 지나 와석분교로 들어가는 골짜기이다. 조선말 정감록(鄭鑑錄)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난리를 피할 수 있고, 흉년이 들지 않아 능히 생명을 보존할 수 있다는 십승지(十勝地)중의 한 곳인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 이름을 미사리(未死里, 죽지않는 곳)라 하였다.
십승지는 풍기 차암 금계촌, 봉화 동쪽인 청양현, 충북 보은 속리산, 운봉의 행촌, 예천 금당실, 공주 계룡산 유구, 마곡 부안의 금바위, 합천 가야산 만수동 등이다. 특히 조선시대 한양 조씨들이 임진왜란을 피하여 집안을 이끌고 미사리에 은거하였는데 그곳은 지금도 조촌(趙村)이라 하고 그 윗동네를 명생동(命生洞)이라고 한다. 조촌의 입향 시조인 조홍필의 무덤은 지금도 진별리 베리골의 양주터에 있다. 그 당시는 주로 경상도 사람들의 십승지 가운데 『七日 寧越正東上流 可藏亂踪 無髮者先入則否, 일곱 째의 승지는 영월 정동쪽 상류이니 어지러운 세상에 종적을 감출만한 곳이나 수염이 없는 자가 먼저 들어오면 틀릴 것이다.』라는 말을 믿고서 명당인 이곳을 찾아와서 자리를 잡았다. 그 후에도 나라가 어지러울 때 평안도 함경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난리를 피하여 찾아든 곳이다. 이곳 십승지는 1993년 11월에 방영한 K.B.S 1T.V『향토기행』이란 프로에서 필자가 소개하기도 하였다.
퐁퐁소
미사리에서 조촌으로 가는 열재 입구에 있는 소(沼)이다. '퐁퐁소' 위에는 2m 높이의 작은 폭포가 있는데 물 떨어지는 소리가 퐁퐁거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도둑바위
미사리 입구에서 실개천을 따라 약 1.5km쯤 올라가다가 도로 우측에 있는 큰 바위이다. 길이 험하고 바위 밑으로 맑고 찬 계곡이 흘러 여름 한철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예전에 이 바위 밑에서 도적이 길 가는 행인의 물건을 빼앗았으므로 '도둑바위'라 불렀다. 그 뒤에는 현재 작은 절을 짓고 있다.
절골
조촌 동남쪽인 주석분교 건너편에 있다. 옛날 절이 있었던 곳으로 지금도 절터에는 기왓장과 아름드리의 은행나무 뿌리가 발견된다. 예전에 큰 절집이 있었는데 빈대가 많이 생겨 스님들이 불태워버렸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골말
조촌의 와석분교 북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한 때는 대여섯 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조씨성을 가진 1가구가 살고 있다.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므로 '골마을→골말'이라고 하며, 이곳의 물은 조촌의 식수로 이용된다. 마을 어귀에 큰 너래반석과 돌서덕이 많이 널려 있다.
젖동개(檜洞)
명생동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뒤에 있는 강원, 충북, 경북 삼도의 경계인 어래산(御來山, 1,063.6m)을 넘으면 충북 의풍리의 어은과 경북 부석면 남대리로 갈 수 있다. 즉 강원, 충청, 경상도의 접경으로 전나무(檜木)가 많았으므로 '전동개→젖동개(檜洞)'라고 한다. 일설에는 경계 지역의 마을이므로 '저쪽동네→저동네→젖동개'라는 지명이 붙었다는 얘기도 있으나 잘못된 주장이다.
의풍에서 고치골을 지나 10리쯤 가면 경북과 경계인 영풍군 단산면 마락리 섶밭 마을로 태백산과 소백산이 만나는 곳이다 이곳 고치령 마루턱에 있는 당집에는 태백산 신령인 단종과 소백산 신령이 되었다는 금성대군의 영정을 함께 모시고 있다. 태백산 자락에 지리한 중동면 녹전 서낭당의 단종 영정 앞에는 매년 주민들이 소 한 마리를 바쳐서 당고사를 지냈듯이, 소백산 두레골(경북 영풍군 단산면 단곡리)에는 산신당(山神堂)이 있고 그 위에는 금성대군(錦城大君)을 모시는 上堂이 있다.
상당에는 순흥에서 유배생활 중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꾸몄던 단종 복위계획이 탄로 나자 죽음을 당한 금성대군의 피묻은 신석(神石)을 모시고 있다. 원래 이 신석은 순흥면 죽동 서낭당에 모시고 순흥사람들이 소를 잡아 당고사를 올렸으나, 구한말 소백산을 중심으로 의병들의 활동이 격렬해지자 일본 헌병들이 순흥에 주둔하면서 마을과 서낭당에 대한 횡포가 심해지면서 이곳 두레골로 옮겼다.
지금도 두레골 사람들은 당고사를 며칠 앞두고 풍기 우시장으로 가서 제물로 바치는 황소를 사서 『謹封』이라 쓴 한지를 머리에 씌우고 양반님(소)을 모시고 온다. 두레골로 옮겨진 소는 제관으로 뽑힌 사람으로부터 아침 저녁으로 문안인사(큰절)를 받으며 며칠간 호강을 누린다. 정월 열 나흘에는 산신당에 새앙(솔째로 바치는 메)을 올리고 황소의 지레, 간, 염통 등은 上堂인 금성대군에게 바치고 나머지는 산신당으로 옮겨서 당고사를 지낸다.
이튿날 정월 대보름에는 子時를 기해 본고사를 올린다. 지금도 당고사에 쓰인 고기와 음식은 마을 사람들 모두가 초헌관집에 모여 화합의 큰 잔치가 벌어질 때 쓰인다.
삼도봉(三道峯)
해발 1,063.6m의 어래산(御來山) 줄기로 강원도, 충청북도, 경상북도의 삼도가 접하는 접경 지역이므로 '삼도봉'이라 한다. 이곳 삼도봉 밑에 있는 충북 단양군 의풍면의 의풍초등학교는 지금도 강원도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에 사는 학생과 경북 부석면 남대리 학생들이 함께 공부하며 가을 운동회 때는 삼도(三道) 주민들이 함께 어울린다.
조촌(趙村)
와석분교가 있는 마을로 임진왜란 이후에 한양 조씨 후손들이 그 집안을 이끌고 십승지(十勝地)의 하나인 이곳에 와서 마을을 개척했으므로 '조촌'이라고 한다. 이곳에 처음 들어온 입향 시조인 조흥필(1707∼1777년)은 진별리 베리골에 부인 인동 장씨와 함께 묻혔는데 그 묘를 가리켜 '양주터'라 부르고 있다. 이곳은 대다수가 한양 조씨로 한때는 40여 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여덟 가구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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