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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지역 이모저모

★ 중동면 유래및지명

영월🏕김삿갓부동산 2009. 3. 7. 11:36


녹전리

녹전리는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111호에 의하여 행정 구역을 개편하면서 녹전리(碌田里)와 유전리(柳田里)에서 첫 자를 따서 '녹전리'라고 하였다.
원래는 상동면으로 면 소재지가 이곳 녹전리에 있었으나 상동광업소가 개광(1923년)되어 1973년에는 구래리의 인구가 3만이 넘자 녹전리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면이 읍으로 승격되면서 읍 소재지를 구래리(九來里)로 옮기게 되었다.
녹전리에는 중동면사무소와 녹전중학교, 지서, 농협, 우체국 등 관공서가 있다.
녹전리는 법정 4개 리로 294가구 1,106명(1992년 기준)의 인구가 녹반리, 행금벌, 응고개, 시누리, 유전리, 도화동 등지의 자연 부락에서 밭농사를 주로 하고 있다.

석항리

원래는 정선땅인데 1914년 상동면에 편입되었다.
돌항소(乭項所)라는 천민 집단 구역이 있었으므로 '석항리(石項里)'라 하였다.
석항리는 태백선 철도가 지나는 곳으로 석항역과 무연탄 집하장이 있으며 농가 9가구, 비농가 101가구로 행정 1개 리에 409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석항 마을 뒤에는 서낭당이 있었고, 화원리, 연상리, 정선군, 신동읍 천포리와 인접하고 있는 작은 리(里)로 특이한 자연부락의 지명을 찾아보기 힘든 곳이다.

연상리

본래 영월군 상동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1914년 연상리, 활라리와 정선군 신동면 석항리 일부를 병합하였으며 1986년 4월 1일 중동면이 되었다.
중동면 연상리는 영월읍 연하리와 석항 사이에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이곳의 지명 유래는 마을 주변을 둘러싼 산봉우리가 연꽃봉우리 현상이고 연하초등학교 뒤에 연꽃이 피는 연못이 있었으므로 '연꽃 蓮'자와 '못 池'자를 써서 땅이름이 만들어진 '연지동' 위쪽에 있으므로 '연상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연상리는 법정 2개 리에 203가구 747명이 마구, 손도리골, 궁장동, 북실, 샘말 등의 자연 부락에서 밭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있다.

이목리

이목리는 화원리와 녹전 사이에 있는 마을로 원래는 상동읍 이었으나 1986년 4월 1일 영월군의 행정 구역 개편으로 중동면에 편입되었다.
이목리라는 지명의 유래는 옛날 어느 도사가 이곳의 형국이 이화낙지형국(梨花落地形局)이므로 배나무를 심으라고 하였다.
원터에 있었던 배나무도 이 때 심은 것이라고 한다.
이목리는 다른 지역보다 배나무가 많았으므로 순수한 우리말로 '뱃재'라고 불렀으나 그 후 '이목리(梨木里)'로 변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이웃에 있는 횟골을 병합하였으며, 1개 법정리에 78가구 307명이 상이목, 하이목, 횟골, 그리고 통일신라시대 큰 절이 있었다는 고장동 등의 자연 부락에서 고추, 마늘, 옥수수 등의 밭농사로 생활하고 있다.
이곳에는 400여년 전 경주 김씨들이 가장 먼저 정착하였다고 한다.
창터 마을에는 전세와 대동미 등 관곡을 보관하던 20칸 짜리 동창(東倉)이 있었고, 녹전리와 경계가 되는 선령약수 건너편 돌서덕에는 세아름이 넘는 큰 신배나무 밑에 원터가 있었다.
이곳 원집에는 식량과 반찬, 짚신 등을 비치해두어 수라리재를 넘어 다니는 길손들에게 숙식을 제공해 주던 곳이다.
물건을 이용한 만큼 엽전을 나무에 꽂아놓았다고 한다.

직동리

직동리는 해발 750m의 높은 지대로 음력 9월이면 민물 김이 채취되고, 조개껍질과 같은 바다생물의 화석이 발견되는 곳이다.
백운산(白雲山) 자락의 두메 산골인 이 마을은 민초(民草)들의 한 어린 사연이 남아 있는 곳으로 의병, 동학교도들이 관군과의 접전에서 집단으로 피살되었으며, 가까이는 1949년 좌익 빨치산에 의해서 이 동네의 우익 청년단원 10여명이 학살당한 곳이다.
'직동리'의 유래는 수많은 의병과 동학교도들이 죽으면서 흘린 피가 계곡 전체를 붉게 물들였으므로 '피 稷'자와 '골 洞'자를 써서 '稷洞里', '핏골'로 부르게 되었다.
큰마을, 찰골, 장수골, 상막동, 하막동, 한밭골 등의 자연부락에서 73가구 267명이(1992년 기준) 화전과 밭농사를 짓고 있으며 김해 김씨가 많이 사는 곳이다.
특히, 깨끗한 물을 이용한 송어 양식장이 여섯 곳이나 생기면서 푸른 빛을 띠고 흐르던 직동천과 주위의 너럭바위들은 그 본래의 깨끗함이 사라지고 있다.
직동리는 산이 높아 옛날에는 호환을 당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지금도 곳곳에 호식총(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의 무덤에 떡시루를 씌우고 삼베할 때 쓰는 쇠챙이를 꽂아놓은 곳)이 있다.

화원리

중동면 화원리는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화라리(禾羅里)'와 '소미원(小味院)'에서 한 자씩 따서 그 지명이 만들어졌다.
화원리는 망경대산 줄기로 고갯길이 험악한 수라리재가 있어서 예부터 원집이 있었다.
원(院)에는 여러 개의 목로방이 있었고 부엌에는 쌀과 반찬이 준비되어 있어서 잠을 자고 난 길손들은 새벽밥을 해 먹고 나무로 만든 엽전꽂이에 돈을 꽂아놓고 길을 떠났다고 한다.
현재는 2개리 91가구에 345명(1992년 기준)의 주민들이 화라리, 바닥터, 점골, 망전이, 소미원, 성황골, 장광마을 등지에서 콩, 옥수수, 감자, 고추 등을 재배하고 있다.

 

 

중동면 옛지명

 

연상리(蓮上里) 본래 영월군 상동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1914년 연상리, 화라리와 정선군 신동면 석항리 일부를 병합하였으며 1986년 4월 1일 중동면이 되었다. 중동면 연상리는 영월읍 연하리와 석항 사이에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이곳의 지명 유래는 마을 주변을 둘러싼 산봉우리가 연꽃봉우리 현상이고 연하초등학교 뒤에 연꽃이 피는 연못이 있었으므로 '연꽃 蓮'자와 '못 池'자를 써서 땅이름이 만들어진 '연지동' 위쪽에 있으므로 '연상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연상리는 법정 2개 리에 203가구 747명이 마구, 손도리골, 궁장동, 북실, 샘말 등의 자연 부락에서 밭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있다. 돌고개(石峴) 연상리의 서남쪽으로 연하리(蓮下里)와 인접한 곳이다. 38번 국도를 개통할 때 이곳 돌산을 뚫으면서 길가에 많은 돌들이 쌓이게 되자 '돌고개'라 하였다. 용소(龍沼) 영월에서 38번 국도를 따라 석항으로 가다가 좌측으로 길게 뻗은 미구(美九) 골짜기 입구에 있는 소(沼)이다. 이곳에는 용(龍)이 되어 승천(昇天)한다는 귀가 달린 이무기가 살고 있다는 전설이 있으므로 '용소'라고 부른다. 조개소 석항 서쪽 돌고개 아래로 조개가 많이 나는 곳이므로 '조개소'라고 한다/ 미구(美九) 영월에서 석항(石項)으로 이어지는 38번 국도 위에 태백석 철교가 지나간다. 그곳에서 북쪽으로 냇물을 가로지르는 안경다리를 건너면 해발 853.6m의 높은 산인 고고산(高古山) 자락에 포근히 감싸여 있는 '미구'라는 마을이 있다. 미구라는 지명은 맑고 푸른 물, 기암절벽, 드넓은 초원, 약초와 산나물, 평화롭게 뛰노는 산짐승, 빼어난 산세, 붉게 타는 가을단풍, 심산계곡에서 자라는 물고기, 겨울산의 설경과 같은 아홉 가지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마을은 울창한 숲과 맑은 계곡이 있어서 여름 한철 많은 피서객이 찾아들고 있으며 뜨내기식당이라는 음식점도 있다. 특산물로는 고랭지 채소, 유실수, 토종꿀 등이 생산되고 있는데 밖에서 보기와는 딴판으로 넓은 벌판과 밭이 있다. 마을 북쪽으로는 정선군 고성리(古城里)와 마구치를 경계로 하고 있으며, 골짜기의 길이는 4km정도가 된다. 안골(內谷) 미구 서남쪽으로 골짜기 안쪽에 있으므로'안골'이라고 한다. 덕재(德峙) 미구치 아래에 있는 높은 고개이다. '덕'은 높은 언덕을 의미한다. 미구치(美九峙) 미구의 가장 북쪽에 있는 고개이다. 고고산 줄기인 정선군 고성리의 고림과 평구로 가는 길이 있다. 푸른소 손도우골 입구에 있는소(소)이다. 예전 망경대산에서 내려오는 계곡들이 이곳에서 깊은 소를 이루어, 위에서 보면 색을 띄고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손도우골 궁장동 옆 골짜기로 피서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옛날에는 호랑이의 행패가 심하여 마을의 가축이나 사람들을 물어갔다. 이러한 호환(虎患)을 방지하기 위해 이곳에다 호랑이를 잡는 손우(손오)를 설치했던 곳이므로 '손우골' 또는 '손도우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얘기가 전한다. 손우라는 기구는 낫처럼 생긴 손우칼을 칡이나 다래 넝쿨을 틀어서 그 위에 매어 놓고 호랑이가 튀김줄을 건들면 손우칼이 호랑이의 허리나 머리부분을 찍어 내리는 기구이다. 일설에는 자연 경관이 아름답고 망경대산 자락에서 흐르는 좁은 계곡 입구인 물목이 되는 곳이라는 뜻으로 '손돌목'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즉 '손돌'은 '좁은 물가'를 뜻하고 '손돌목'은 '좁은 물가의 길목'을 의미한다. 그 안쪽은 안손돌목과 궁장동이 있다. 자영치(字嶺峙) 내손도우에서 하동면 예밀리와 주문리의 검바위를 지나 싸리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궁장동(弓長洞) 돌고개를 지나 미구(美九)의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마을로 지금은 대여섯 가구가 살고 있다. 망경대산 자락이 길게 꼬리를 늘어뜨린 계곡 사이로 활(弓)모양으로 형성된 곡류천(曲流川)이 높고 낮은 산봉우리에 둘러싸인 채 손도우골을 지나 석항천과 합류하여 남한강 상류의 지류를 형성한다. 이곳은 지형이 커다란 활 모양을 하고 있으므로 '궁장동'이라고 하는데, 계곡이 깊고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여름에는 많은 광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이곳을 지나면 주문리와 화원리로 갈 수 있다. 또한 맑은 계곡물을 이용한 송어양식장이 있다. 구미소(구무소) 북실 입구와 강원송어장 사이에 있는 소(沼)이다. 예전에 석항과 연상리 사람들이 이곳에서 천렵을 했던 곳으로 구멍이(구무) 움푹 파이고 물이 깊어서 명주실 한 꾸리를 다 풀어도 닿지 않았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으나 여러번의 물난리를 겪는 과정에서 많이 묻혀버렸다. 구멍을 뜻하는 구무소가 세월이 흐르면서 '구미소'로 변하였다. 동지골 단배골 우측에 있는 작은 골짜기이다. 이곳은 햇볕이 들지 않는 추운 음지쪽이므로 '동지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단배골 동지골 동쪽에 있다. 이 마을에는 단 맛이 나는 커다란 배나무가 있었으므로 '단배나무골→단배골'이라 불렀다. 개상골 석항 서북쪽의 북실과 참샘물 사이로 넓은 밭과 대추나무가 많다. 석항천이 마을 앞으로 흐르고 마을 뒤로는 고고산 줄기가 뻗어내렸다. 이 곳의 지명 유래는 마을이 개(물가)와 붙어 있는 곳이므로 '개살이골→개산골→개상골'로 변하였다. 참샘물 돌고개를 지나 38번 국도와 태백선 철도가 교차되는 철도 건널목 아래에 있다. 사시사철 물이 풍부하고 수온이 11°c의 차가운 물로, 간이 상수도가 설치되기 전에는 석항의 모든 사람들이 물동이와 지게를 지고 이곳의 물을 길러 먹었다. 지금은 수질이 좋은 이 물을 이용하여 강원송어장에서 송어를 키우고 있다. 북실 연상초등학교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한때는 30여 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17가구가 살고 있다. 이곳은 북쪽에 있는 마을이므로 '북실'이라 한다. '실'이란 '골짜기(谷)'의 이두식 표기로 '마을'을 의미한다. 일설에는 이곳에 있는 산의 형상이 북을 달아놓은 것처럼 생겼다하여 '북실'이라고 한다는 얘기와 마을의 형상이 베틀에 사용하는 '북실'같이 생긴데서 유래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샘말 북실 마을의 우측 언덕 위로 효자 유영복(劉永福)의 집이 있었으며, 물맛이 좋은 샘이 있으므로 '샘마을→샘말'이라 한다. 덕골 샘말 위쪽으로 산 중턱 언덕 위에 넓은 평지밭이 있으므로 '덕골'이라고 한다. '덕'은 '산 위에 있는 평밭(坪田)'을 지칭하는 말로 '덕' 또는 '덕시'라고도 한다. 살개바우 덕골 서북쪽에 있는 큰 바위다. 야행성 산짐승으로 꿩이나 다람쥐 등을 잡아먹는 살쾡이가 겨울이 되면 농가에서 키우는 닭을 물어다 이곳 바위 밑에서 뜯어 먹었으므로 '살개바우'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고장에서는 '살쾡이를 '살개' 혹은 '살기'라고 부른다. 북실 서낭당 북실 끝자락인 성문재 아래에 있다. 평소에 술을 많이 먹는 지발광이라는 환쟁이가 그린 당화(堂畵)가 서낭당 감실에 보관되어 있다. 연하리 숫가마서낭당과 두평서낭당에 있었던 그림도 같은 사람의 작품이었으나 6.25사변 때 없어졌다. 성문재(城門峴) 북실 끝자락인 서낭당 북쪽에 있다. 성문재를 넘으면 옛날 성(古城)이 있었던 정선군(旌善郡), 신동면(新東面), 고성리(古城里)로 넘어갈 수 있으므로 '성문재'라 한다. 고성(古城)은 성문재를 넘고 평구와 내창을 지나 고방 마을에 있는 성으로 영월의 왕검성, 대야성, 태화산성 그리고 영춘의 온달산성과 같이 삼국 항쟁기인 5∼6세기경에 축조되었다고 한다. 화원리(禾院里) 중동면 화원리는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화라리(禾羅里)'와 '소미원(小味院)'에서 한 자씩 따서 그 지명이 만들어졌다. 화원리는 망경대산 줄기로 고갯길이 험악한 수라리재가 있어서 예부터 원집이 있었다. 원(院)에는 여러 개의 목로방이 있었고 부엌에는 쌀과 반찬이 준비되어 있어서 잠을 자고 난 길손들은 새벽밥을 해 먹고 나무로 만든 엽전꽂이에 돈을 꽂아놓고 길을 떠났다고 한다. 현재는 2개리 91가구에 345명(1992년 기준)의 주민들이 화라리, 바닥터, 점골, 망전이, 소미원, 성황골, 장광마을 등지에서 콩, 옥수수, 감자, 고추 등을 재배하고 있다. 화라리(禾羅里) 석항에서 녹전으로 가는 수라리재 아래 새벌마을, 잿마을, 점골을 통틀어서 말한다. 마을의 진산(鎭山)에 해당하는 수라리재의 지세(地勢)가 너무 강하므로 마을의 기(氣)를 살리기 위하여 돌단배기에다 조산(造山)인 돌탑을 쌓고 마을 이름도 수라리재의 '수'와 대립되는 '화'를 넣어 '화라리'라고 하여 마을의 기(氣)를 강하게 했다고 한다. 새벌마을(新坪洞) 화라리의 31번 국도 동쪽에 있는 마을로 벌판에 새로운 동네가 형성되었으므로 '새벌마을'이라고 하였다. 공마을 화라리 동쪽에 있다. 마을에 있는 암반으로 된 돌구멍에서 샘물이 솟아나므로 '공마을'이라고 한다. 뒷대골(後大谷) 마을 뒤쪽에 있는 큰 골짜기이므로 .뒷대골'이라 한다. 덕밭골 뒷대골 서쪽에 있다 돌이 많은 신전으로 농사를 지을 때 쌓아놓은 커다란 돌서덕밭이 많은 골짜기이므로 '돌서덕밭골→서덕밭골→덕밭골'이 되었다. 이 골짜기를 넘으면 연상리의 궁장동으로 갈 수 있다. 솔안이(松內) 화라리 동쪽으로 소나무숲 안에 있으므로 '솔안'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지금도 수라리재로 가는 도로의 좌우측에는 소나무숲이 우거져 있으며 동쪽 언덕 위의 넓은 들녘에는 솔안이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돌단배기(造山) 화라리의 지세(地勢)는 남쪽을 가로막고 있는 수라리재의 맥이 너무강하게 뻗어내려 마을 자체를 위협하는 형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솔안이 뒤에다 조산(造山)인 돌단을 쌓고 마을의 약한 기(氣)를 보강하였으며, 그 때 쌓은 돌탑이 있었던 곳을 '돌단배기'라 부르고 있다. 바닥터 화원리 자체가 험준한 태백산 줄기의 언덕 위에 형성되었는데, 이 동네만 넓고 평평한 바닥에 조성되었으므로 '바닥터'라고 불렀다. 점골(店谷) 화라분교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에 이곳에는 진흙으로 옹기 그릇을 굽는 옹기점 마을이 있었으므로 '옹기점말→점말'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옹기점에서는 오짓물을 발라 구운 오지 그릇은 생산하지 않고 진흙만으로 초벌 구이를 해서 만든 윤기가 없는 질그릇인 대독, 중도리독, 항아리, 화로, 시루 등을 만들었다고 한다. 잿마을 수라리재 위인 잿말랑(고개마루)에 있으므로 '재위에 있는마을→잿마을→잿말'이라는 유래가 생겼다. 수라리재 화원리에서 녹전으로 넘어가는 31번 지방 도로 중 가장 험한 고개이다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恭讓王)이 삼척의 궁촌으로 유배될 때 이 고개에서 수라(왕이 먹는 음식)을 들었다 하여 '수라리재'라고 한다는 유래가 있다. 공양왕은 태조 이성계에 의해서 원주군 부론면 손위실에 유배되었으나 한양과 너무 가까운 곳이라 하여 1392년 8월 7일(음력)에 고성군 간성읍 탑동리(塔洞里)의 수타사(壽陀寺)로 옮겨져서 굴욕의 나날을 보냈다. 공양왕의 삼척군 궁촌으로 세 번째로 유배되었다가 결국은 조선 태조 3년 1394년 4월 17일에 죽임을 당했다. 화장터골 옛날 호환(호환)이 심했을 때 호랑이게 물려간 사람들의 시신을 불태우던 곳이다. 호환에 간 사람은 창귀가 붙었다 하여 화장을 한 후 창귀을 가두기 위하여 돌무덤을 만든 다음 떡시루를 덮고 그 위에 길쌈을 할 때 쓰는 가락꼬치인 쇠꼬챙이를 꽂아 두었다. 예전에 이동네에 살던 우모씨가 7월에 삼(마)을 찌는데 갑자기 큰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한다. 우씨는 호랑이를 막기위해 문짝에다 통나무 발을 쳐 놓았지만 이 발을 후려치고 우씨를 물고 갔다. 우씨도 이곳에서 화장을 당했는데 그를 마지막으로 호환은 없어졌다고 한다. 호랑이에게 물려간 사람들의 시신을 태우던 곳을 '호식총,화장터골, 돌무덤,범다물'이라 부르는데 영월 지방에는 이러한 지명이 많이 있다. 당재 수라리재 옆에 있는 고개로 31번 국도가 개통되기 전에는 사람들이 개울 옆으로 난 이 고개를 넘어 다녔다. 즉 가이천 위에서 잿마을로 질러가는 지름길로 그 언덕에는 서낭당과, 행인들이 안녕을 기원하며 돌을 주워 쌓아놓은 국시당(돌무더기)이 있었다. 즉, 서낭당(城皇堂)이 있는 고개이므로 '당재'라 한다. 망전리(望田里) 화라리에서 소미원(小味院)과 망경대산(1,087.9m)이 있는 한일탄광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망경대산 밑에 형성된 마을이므로 '망전'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전에 망경탄광(한일광업소)이 있었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거주했었다. 가르내(가이천) 수라리재 남쪽에 있는 동네이다. 화라리와 망전리에서 흘러내리는 냇물이 이 마을 앞에서 수라천과 이목천으로 갈라져 흐르므로 '갈라진내→가르내→가이천'이라 한다. 고비덕 망전이 위쪽으로 높은 언덕배기에 있는 마을이므로 '고비덕'이라 하였다. '고비'는 높은곳을 의미하고 '덕'은 '덕시,언덕'을 뜻하는 말이다. 이곳은 단종대왕에게 머루 , 다래를 진상했던 충신 추익한(추익한)이 살던 마을로 예전에는 추계 추씨들이 많이 살았는데 추 충신의 묘는 연상리 궁장동 건너편에 있다. 삿갓봉 화라리와 망전리로 갈라지는 곳에 솟은 산봉우리로 삿갓처럼 뾰족하게 생겼다 소미원(小味院) 화원리의 소미원에 있었다. 31번 국도가 개통되기 전에는 영월, 정선 사람들이 삼베를 가지고 삿갓봉을 넘어 경북 봉화군에 있는 춘양장과 소천면의 소천장에서 쌀과 바꾸어 왔다. 날이 저물면 행인이나 상인들은 이곳의 살모디기 부근에 있었던 원지(院舍)에서 숙식을 해결하였다. 그리고 짐을 싣고 다니던 말이 죽으면 파묻었던 곳을 '말무덤'이라 부르고 원집이 있었던 솔모디기 부근을 '원터'라고 한다. 원터에는 유랑생활을 하며 떠돌아 다니는 '선질꾼'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중의 적삼을 입고 머리에는 수건을 동여맨 채 감발 짚신을 신고 다니면서 물건을 팔았다. 이들 중에는 생활근거지도 없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노중(路中)에 죽으면 마을 사람들이 양지 바른 곳에다 장사를 지내주는 것이 관례였다. 시무소구렁 삿갓봉과 아래망전이 사이에 있는 깊은 소(沼)이다. 옛날에는 웅덩이가 깊었으나 지금은 많이 묻혔다. 오금터골(烏金) 소미원의 아래망전이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일제시대때 일본인들이 사람을 동원하여 금을 캐기 위해 50m정도의 금광굴을 뚫었는데 누런 금은 나오지 않고 검은 금(석탄)이 나왔다고 하여'오금터골'이라고 하였다. 이 굴은 잘 보존되어 있다. 아래망전이(下望田) 석항과 화라리를 지나서 소미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마을이다. 망전이 밑에 있으므로 '아래망전이'라 부른다. 현재 3가구가 살고 있다. 원터(院基) 소미원은 경북 봉화로 가는 교통의 요충지로 서낭당 북쪽의 솔모디기 부근에 원집(院舍)이 있었다. 원집은 조선 후기로 넘어오면서 인가(人家)가 드문 곳에 원(院)을 설치하고 쌀, 반찬, 짚신 등을 준비해 두었으며 길손들이 이곳에서 잠을 자고 난 후 밥을 해먹고 짚신을 신고 가게끔 편의를 제공했었던 곳이다. 행인들은 그 대가로 일정액의 엽전을 나무로 된 엽전꽂이에 꽂아놓았다. 원집이 점차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결곡은 목로집(뜨거운 방바닥에 여러 사람들이 목침을 베고 자는)형태로 전락하고 말았다. 말묘 원터 옆에 있는 무덤으로 예전에 상인들이 짐을 싣고 다니던 말이나 노새가 죽으면 이 곳에다가 묻었으므로 '말무덤,말묘'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 솔모디기 원터가 있는 곳으로 소나무가 많이 자라는 곳이므로 '솔모디기'라 부른다. 성황골(城皇谷) 소미원의 서낭당 부근에 있는 마을이므로 '성황동'이라고 부른다.이곳 서낭당은 최영장군(崔瑩將軍)을 모시는 곳으로 정월 대보름 쌀,옥수수, 누룩등을 형편에 맞게 거두고 돼지머리 , 삼색 실과, 포 등의 제물을 준비한다. 마을 사람들 중에서 일진(日辰)과 나이를 팔괘에 맞추어 생기(生氣)를 짚어 유사(有司)를 뽑는다. 이때부터 그 집을 당주(堂主)집이라고 부르고 유사는 몸을 깨끗이 하고 부정한 것을 삼간다. 성황목인 당목(堂木)으로 세 아름이나 되는 커다란 가랍나무(참나무)가 있으며 5월 단오 때는 마을 사람들이 그네를 매어 놓고 놀기도 하였으나 1990년 폭우로 부러고 말았다. 이 곳 서낭당 내부에는 '崔瑩將軍之神'이라는 신위(神位)와 커다란 돌2개가 있으며 , 자식없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메를 지어놓고 밤을 새워 소망을 빌기도 한다. 이 곳 소미원과 덕구리,외룡리 등지에는 최영장군을 모신 서낭당이 많다. 무장인 최영장군을 신으로 모시는 것은 호환을 막기 위해서 였다. 장광마을 마을 회관 남쪽의 넓은 들녘에 있는 마을이다. 이곳은 병자년(丙子年) 가락때 큰 홍수로 인하여 너럭바위와 자갈로 뒤덮였다고 한다. 즉 물가의 넓은 돌밭에 있는 마을이므로 '장광마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위쪽에는 고령토 광산이 있다. 장광 약수터 장광마을의 고령토광산 밑에 있다. 위장병에 효력이 있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비비재 장광마을 동쪽에 있으며 이목리의 고장골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산이 높고 험하여 산모퉁이를 비비 돌아서 넘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명주바우 장광마을 밑에 있다. 이 곳은 토종벌이 잘 드는 곳으로 바위 아래에 벌통을 놓고서 토종꿀을 떳는데 , 그 주인이 이사를 가면서 명주 한필과 토종벌 한 통을 맞바꾸었으므로 '명주바우'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 떡갈목이(德葛木) 장광 동쪽 이목리로 가는 산길이 있다. 예전에는 대여섯 가구의 화전민이 살았으나 지금은 무인촌이 되었다. 이것은 참나무과에 속하며, 늦봄에 황갈색의 꽃이 피었다가 도토리 열매가 달리는 떡갈나무가 많은 고개(목이)이므로 '떡갈목이'라 부르게 되었다. 지경터(地境) 장광마을 남쪽에 있다. 지경이란 땅의 경계를 말하는 것으로 이곳은 중동면 화원리와 하동면 외룡리의 경계가 되는 곳이므로'지경터'라 한다. 반정이(半程理) 지경터 아래에 있는데 이곳은 화원리(禾院里)와 와석리(臥石里)의 중간 지점이 되므로 '반정이→반쟁이'라고 하였다. 서산터골 지경터 서쪽 산 밑에 있는 골짜기이다. 가는골 장광마을의 서쪽으로 매봉간 아래가 된다. 예전에 나무꾼들이 땔나무를 하러 다니던 곳으로 골이 가늘고 길다고 하여 '가는골'이라 한다. 남쪽으로 가면 싸리재로 가는 길이있다. 싸리재 소미원 남쪽에 있는 고개로 이 고개를 넘으면 주문리의 '싸리재마을'과 대장간이 있어서 농가구를 벼름질하던 '벼름이'로 갈 수 있따. 즉 싸리재 마을로 가는 고개이므로 '싸리재'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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