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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지역 이모저모

★ 역사가 흐르는 강, 영월 동강 역사기행, 4대강 물길여행

영월🏕김삿갓부동산 2009. 4. 22.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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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으로는 태백산맥을, 남으로는 소백산맥의 기운을 받아 이루어진 강원도 영월... 영월을 에돌아 흘러가는 남한강과, 정선과 영월을 잇대어 유유히 흐르는 동강처럼 영월의 역사도 면면히 오랜 세월을 이어 내려오고 있다. 영월의 역사와 생명의 젖줄인 동강. 생태계의 보고 동강엔 오늘도 수달과 어름치, 쉬리와 황조롱이들이 찾아든다. 길이 65km의 동강은 옛날 강원도 정선 아우라지에서 목재를 뗏목으로 엮어 큰 물이 질 때 서울까지 운반하는 물줄기로 이용되다가 1957년 태백산 열차가 들어오면서 수운으로써의 기능을 잃었다. 자연경관 또한 아름다운 동강은 어라연 계곡과 황새 여울을 비롯해 곳곳마다 기암절벽과 비경이 펼쳐진다.

영월의 아름다운 비경 중 하나로 꼽히는 고씨동굴. 길이가 6km가 넘는 고씨동굴은 1969년 천연기념물 제219호로 지정됐다. 고씨동굴은 약 4억년 전 형성된 4개의 호수를 비롯해 3개의 폭포와 10개의 광장이 있는데,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종유석과 석순 석주들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장관을 이룬다. 고씨동굴이란 이름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왜병과 싸우던 고씨 가족들이 이 동굴로 올라가 피신했다는데서 유래됐다고 한다.

강원 남부지역의 문화와 교통, 행정과 상업의 중심지닌 영월. 영월의 역사는 선사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한강 상류, 일조량이 길고 땅이 기름진 와룔리는 예로부터 농사가 잘되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특히 이곳에 서있는 고인돌 3기는 당시 이곳이 우리 조상들의 삶의 터전이었음을 말없이 일러 주고 있다.

영월군 곳곳에는 다양한 시대에 걸쳐 형성된 인간 활동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영월은 석회암 지대가 광범위 하게 발달되어 있어 유난히 자연동굴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영월군 남면 연당리… 동네 사람들이 쌍굴이라 부르던 동굴은 옛 조상들의 역사를 알려주는 유적의 보고다.

너비 4m, 높이 1.5m, 전체길이 20m에 달하는 제1굴에서는 다양한 문화층이 확인되었는데 구석기 시대에 불을 땐 흔적과 함께 긁개와 밀개 등 다양한 석기류와 코뿔소, 원숭이 등의 동물뼈가 발견되었다.

신석기 시대 유물층에서는 빗살무늬 토기와 가락바퀴, 뼈로 만든 낚싯바늘, 그물추, 부서진 조가비 팔찌 조각외에도 사슴과 노루, 토끼 등 많은 동물의 뼈가 함께 발견되었다. 또한 이곳에서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발견되어 고려시대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새로운 유적지가 되었다.

영월에는 옛 우리 조상들의 활동 흔적과 생활상, 식생활과 장묘 풍습, 문물 교류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인 증거가 남아있다. 길이 5.5m에 너비 2.5m 내외의 규모가 작은 제2굴에서도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시대의 유적층이 잘 드러난다.

특히, 후기 신석기 시대 생활 터에서는 굴 껍질과 조개로 만든 투박한 팔찌가 발견되었는데 이점으로 미루어 신석기 시대에는 해안지역과 다양한 교류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영월 동남쪽에는 왕검성, 대야산성, 온달성, 봉래산성 등 4개의 산성이 자리잡고 있는데, 그중 우두에 해당하는 주성이 바로 왕검성이다.

고구려시대에 거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왕검이 직접 세웠다하여 왕검성이란 이름이 붙었다. 왕검성은 닭의 발처럼 생겼다고 해서 계족산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정양산 줄기의 끝자락인 해발 550 m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가파른 산 봉우리에 자리잡은 왕검성은 둘레 771m, 높이 6m, 폭이 4m에 달한다. 왕검성은 고구려의 남하정책으로 축조된 마안봉 지형의 포곡식 산성으로 자연석을 이용해 축조한 것으로 산성으로서의 입지조건이 매우 좋은 편이다.

왕검성 오르는 길목, 남한강을 내려다 보는 경치 좋은 곳에 정조대왕 태실비가 서 있다. 조선 22대 왕위에 오른 정조대왕의 태를 봉안한 태실은 영조 29년인 1753년 계족산에 처음 조성되었고 정조가 사망한 뒤 순조 원년인 1800년에 가봉하고 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에서 태실의 관리와 유지가 어렵다는 이유로 태항아리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한국 전쟁 이후 태실과 태실비가 훼손, 매몰되었던 것을 1997년 현재 위치에 다시 복원하였다.

영월에는 정조대왕 태실과 함께 철종대왕 태실이 있는데 영월군 주천면 신일리 망산의 태실봉 으로 지난 1985년 문화재 관리국에서 철저한 고증을 거쳐 이 태실봉을 철종대왕 태실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철종의 태를 어떻게 이곳에 모시게 되었는지 언제 모셨는지에 관한 자료가 없어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이곳에 봉안된 태실은 정조대왕의 태실과 마찬가지로 1929년 수거되었고 지금은 개석 한개와 금표비만 남아 이곳이 조선 왕실의 태실터였다는 사실을 말없이 알려 주고 있다.

영월읍에는 조선시대에 지어진 향교가 있다. 선현을 섬기고 지방민을 교육하기 위해 세워진 향교는 제사와 교육이라는 두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나라에 향교를 설치한 것은 고려 인종 시대부터 지만 전국적으로 확산된 시기는 조선시대 부터이다.

조선 초기 태조는 나라를 개국하면서 즉위교서에 향교의 설치를 표명하고 지방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고려말 이후 존속해 온 향교의 복구는 물론 향교가 없는 군현에서도 수령과 지방사족에 의해 지방 향교가 창건되었다.

영월향교의 설립도 그 무렵의 일로 태조 7년인 1389년에 향교를 설치했다고 전해진다. 영월 향교의 기본구조는 전국 향교와 공통적으로 공자를 모신 대성전, 선현의 제사를 모시는 동서무의 사묘, 학생들의 강학 장소인 명륜당, 숙소에 해당하는 동서재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영월 향교의 여러 건물 중 대성전은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기도 했다.

대성전에 봉안되어있는 성현은 중앙과 지방에 따라 신위의 수에 차이가 있는데, 영월 향교는 공자를 중심으로 맹자, 주자 등의 5위와 함께 이퇴계, 이율곡 등 우리나라 유학자 20위 등 25위를 모시고 있다.

현재 영월 향교에서는 매년 춘추로 초정일에 석전제를 올린다. 영월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비운의 임금인 단종의 유배지로 영월 향교 출신의 많은 유림들이 충신의 이름으로 후세에 기억되고 있다.

조선 6대 임금, 단종. 문종의 외아들인 단종은 세종 22년인 1441년에 태어나 12살인 1452년 조선의 여섯 번째 임금에 올랐다. 그러나 숙부인 수양대군, 세조에 의해 즉위한 지 3 년만에 왕위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 후 1457년 세조에 의해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고 그 해 10월24일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등졌다.


장릉은 단종의 시신이 강가에 버려졌던 것을 영월의 호장인 엄홍도가 지금의 자리에 몰래 묻고 사라졌다고 전해온다. 그 후 중종의 명에 의해 봉분이 꾸며졌고, 숙종시대에 이르러서야 장릉이라는 묘호를 받을 수 있었다. 장릉을 찾는 이들은 장릉 주위의 소나무들이 모두 능을 향해 절을 하듯 굽어있는 모습을 보고 경이로움을 느낀다고 말한다. 장릉에는 단종의 일대기와 역사적 사료를 수집하고 전시하고 있는 역사관, 단종과 관련한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유물관, 사육신과 생육신을 기념하는 예술관이 있다.
정조 15년인 1791년 영월 부사 박기정은 장릉의 제를 지낼 때 우물의 필요성을 조정에 보고하고, 우물을 팠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영천이다. 영천은 제사을 지낼 때만 사용했는데, 평소에는 샘에서 솟는 물의 양이 일정하나, 제를 지낼 즈음인 한식때만 되면 샘물의 양이 많이 늘어난다고 한다. 장릉에는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종친과 충신, 환관과 궁녀 등 264 명의 위패를 모신 배식단사가 있고 배식단사 앞에는 단종 제향때 이들에게 제물을 차려놓고 제향을 지내기 위해 축조된 4단의 배식단이 있다.

옛 영월 객사의 동헌 건물인 관풍헌은 태조 1년인 1392년 건립되었다. 이후 60여년이 지난 뒤인 1457년 단종은 청령포에 유배되었다가 홍수 때문에 이 곳 관풍헌으로 옮겨와 머물던 중, 세조의 명으로 금부도사 왕방연이 가지고 온 사약을 먹고 사사 되었다.
관풍헌에서 약 70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자규루는 옛 객사 근처의 건물로 정면 3간, 측면 2각으로 이루어진 누각이다.
자규루는 1단의 자연석 기단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원주를 사용했는데 좌측의 첫째 칸에 나무 계단을 설치해 오르 내리기 편리하게 했다.
세종 10년인 1428년 창건하면서 매죽루라는 이름을 붙였으나 단종이 이곳 객사에 머물면서 누각에 올라 자신의 심경을 자규시로 읊었다하여 자류루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영월읍에 위치하고 있는 보덕사는 장릉의 능사로 알려진 사찰로 이 곳의 극락보전은 지난 1980년대 강원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보덕사 극락보전은 고려 의종 15년인 1161년 운허 선사와 원경국사가 증축한 것이라고 전해지지만 현재 건물은 조선 후기 양식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 지붕에 다포식 건물이다. 특히, 정면과 측면에 각각 5개의 빗살문이 있고, 좌우래문에도 3개의 빗살문을 볼 수 있다. 4개의 기둥에는 주련이 있으며 화려한 단청이 돋보인다.

보덕사에는 신라 문무왕 시절에 의사 조사가 창건한 암자가 있는데, 창건할 당시에는 지덕암이라 불렸으나 조선 세조에 이르러서는 금몽암으로 이름이 바뀐다.
보덕사에 전해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단종이 영월로 유배된 후, 이 암자가 궁에 있을 때 꿈속에서 유람하던 곳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하여 금몽암이라 이름하게 되었다.
금몽암은 ‘ㄱ’자 형으로 동쪽에 높이 150cm 가량된 석축기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과 북쪽에 정면 3간, 측면 1간의 누각식 2층 건물이 연결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여러차례 중수하여 영조 21년에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고 하는데, 사찰 건물과는 다른 민가 형태로 재건, 일반가옥의 형태로 사용되고 있다.

영월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불교성지로도 꼽히는데 그 이유는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 하나인 법흥사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적멸보궁이란 온갖 번뇌와 망상이 사라진 보배로운 궁을 뜻한다. 법흥리 사자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법흥사는 신라 선덕여왕 시절에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가사, 발우 등을 전수받아 봉안한 사찰로 불보 사찰이라고도 불린다.
현재 , 법흥사에는 3개의 석탑과 한개의 수호 석불좌상 자장 율사가 수도하던 토굴, 적멸보궁, 그리고 강원도 문화재인 사리탑과 징효대사 부도 등이 남아 옛 위세를 짐작케 한다. 또한 종이가 없던 시절, 인도 영라수 잎에 범어로 기록한 패엽경 등 소중한 유물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강원도 영월읍 팔괴리에는 땅을 파면 간혹 오랜 기와 조각이 발견된다. 고구려시대 것으로 보이는 이 기와를 통해 근방에 성터가 있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영월에 축조된 산성은 정양성과 대야성, 그리고 온달성과 태화산성 등 모두 4개인데, 모두 같은 시기에 축조됐다고 전해진다. 4개의 산성 중,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태화산의 토성은 적을 감시하고 그 상황을 우군에게 연락 하는 사령탑 역할을 하던 곳으로 볼 수 있는데,
이제는 사라져 그 터만 남은 태화산성에는 슬픈 남매의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옛날 옛적에 영월 어느 집안에 남매 장수가 있었는데 그 어머니는 성 쌓는 내기를 시켜 이기는 자식을 키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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