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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김삿갓노래 (가수별&

영월🏕김삿갓부동산 2020. 11. 22. 20:24

방랑 시인 김삿갓 노래는 어릴 적부터 많이 듣고 좋아했고 김삿갓의 시를 좋아했다.그래서 영월 법흥사 적멸보궁을 보고 구봉대산 산행을 하고 도착하니 12시였다. 영월에 왔으니 관광안내 지도를 보니 김삿갓 유적지가 있기에 12시 10분에 김삿갓 유적지로 출발했다

난고 김병연 초상화 난고 김병연(김삿갓)

출생: 1807년(순조 7년) 3월 3일 ~ , 조선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

사망: 1863년(철종 14년) 3월 25일(57세) 조선 전라남도 화순군 동북면 안 참봉 사랑방

학력: 1826년 백일장 과거 장원 급제

종교: 유교(성리학)

필명: 자는 성심, 호는 난고, 별칭은 방랑 시인, 일명은 김난, 속칭은 김삿갓, 김립

부모: 아버지, 김안근

어머니, 함평 이씨 부인

형제: 형 김 병하, 둘째 김 병연(김삿갓), 셋째 김 병호, 넷째 김 병두

배우자: 장수 황 씨 부인

자녀: 장남, 김학균

차남, 김익균

셋째, 김영규

두리둥실 내 삿갓은 빈 배와 같은데

한번 썼다가 사십년 평생 쓰게 되었네

목동이 가벼운 차림으로 들녘 송아지 치기 좋고

어부가 본리 모습으로 강가 갈매기 짝하기 좋지

취하면 벗어다가 구경하던 꽃나무에 걸어두고

흥이 일면 옆에 끼고 달 감상하는 누대 오르네

세상사람들 의관이야 모두 겉치장이지만

하늘 가득 비바람 쳐도 홀로 걱정 없다네

저기 앉은 저 노인네 사람 같지 아니하고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인가 하노라

슬하에 일곱 자식이 모두 도둑놈인 것이

하늘에서 복숭아를 훔쳐다가 잔치를 빛내누나

도로 옆 김삿갓 유적지 표지 석

법흥사에서 김삿갓 유적지까지 64km 정도로 국도와 지방도를 타고 달려서 14시 30분에 도착했다.

한적한 도로를 달려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오색의 물감을 풀어 놓은 것 같은 것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법흥사에서 김삿갓 유적지까지 60km가 넘는 국도와 지방도를 달려서 14시 30분에 유적지 입구에 도착하여, 주차장 입구까지 올라가니 작은 주차장에 더 이상 주차공간이 없어서 후진해서 도로 옆에 주차하고 올라갔다.

(주차는 난고 문학관 앞에 주차장이 있다. 그곳에 주차하고 유적지까지 걸어와야 하는데 나는 모르고 도로가에 주차를 했다)

이곳 난고 김병연(김삿갓) 유적지는 강원도 시책 사업으로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추진되어 유적지 및 도로포장 등 기반 시설이 조성되었다.

걸어서 올라가는 길 옆으로 김삿갓 조형물과 많은 글귀들이 비석에 새겨져 있었다.

김삿갓 조형물과 유적비

김삿갓이 속이 좁은 친구 집에서 생긴 일화

김삿갓이 친구네 집에 놀려 갔는데

안 주인이 "식사 올리오리까?" 하고 묻자

그 친구가 "저 친구가 가거든" 하고 답했다.

그러자 김삿갓이 화를 내며

"가소롭구나 이 나쁜 자식아" 하고 가 버렸다

식탁 위에 생선

명천명천인불명 어전어전식무어

밝다 밝다 하면서도 사람은 밝지 못하고

어물전 어물전 하면서도 어느 한 집 식탁에 생선이 없네

김삿갓 묘

1863년(철종 14년) 3월 25일 57세의 나이로 전라남도 화순군 동북면 안 참봉의 사랑방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가 죽은 뒤 마을 뒤편에 묻혔고, 삼 년 후에 둘째 아들 익균이 부친의 유골을 수습하여 강원도 영월 하동면 노루목 지금의 이자리로 이장을 했다.

김삿갓 묘를 둘러보고 내려와 보니 김삿갓 주거지로 가보기로 했다.

김삿갓 주거지까지 시멘트로 된 포장도로가 있었다.

거리는 1.8km라, 걸어서 올라갔다. 오전에 법흥사 구봉대산을 등산을 하고 왔기에 조금은 무리라고 생각했지만 올라갔다.

김삿갓 주거지, 오르막길을 오르면서 생각을 했다.

깊은 골짜기에 살면서 처자식을 버려두고 혼자 방랑 시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그에게는 행복한 삶이었을까?

장원 급제하기 전까지 조부에 대해서 몰랐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오르는 길 옆으로 작은 계곡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당집과 이정표

김삿갓 주거지

김병연(김삿갓) 주거지는 1982년 발견할 당시 이곳에서 살았던 엄운섭(당시 64세)의 증언에 의하면 1972년 경 주거지 본채의 대들보가 썩어 내려앉아서 철거하고 바깥채에서 살고 있다고 하였다.

화전촌의 집은 모두가 통나무로 짓는 것이 관례인데 이집 본채 자리 철거 목재는 기둥, 천장보, 도리등이 도끼로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어머니가 양반 댁의 안목 있는 주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의 주거지 건물은 강원의 얼 선양사업의 일환으로 2002년 9월에 복원한 것이다.

김병연(김삿갓) 초상화를 모신 집

영화의 한 장면

술을 마시며 노래하고 싶어도 옛사람은 가고 없고

꾀꼬리 울음소리만이 울적한 마음을 괴롭히네

강 건너 버들가지는 마냥 싱그럽기만 한데

산골짜기 돌아가니 매화 향기가 봄 같구나

이곳은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길목이라

날마다 우마차 수레에 티끌이 이는구나

임진 나루 강북에는 잡초만이 무성한데

나그네의 시름은 수많은 생각으로 새롭구나

지팡이 하나로 구름 헤치며 걸음 마다 섰노라니

산은 푸르고 돌은 흰데 사이사이에 꽃이 있구나

만일 화공에게 이 경치 그리게 한다면

그는 어찌할까, 숲 속의 새소리를

*난고 김병연(김삿갓)*

난고 김병연은 안동 김씨 시조인 고려 개국공신 삼중대 광태사 후예로 휴암 공파계 제24대 손이다.

1807년(순조 7년) 3월 13일 경기도 양주군 회전면 회암리에서 부 김 안근과 모 함평 이씨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났고, 본명은 병연 자는 성심 호는 난고 별호는 김삿갓 또는 김립이다.

1811년(순조 11년) 김 병연이 5세 때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 당시 그의 조부이자 선천 부사(선천 방어사)였던 김익순은 반란군 홍경래에게 항복을 하였다.

김익순은 함흥 중군(정3품)으로 전관되어 온 지 불과 서너 달이 지난 상태였다.

신임지에 와서 어수선한 일을 정리한 후 시골의 저명한 선비들을 모아 수일간 잔치를 열었는데 새벽에 반란군이 쳐들어와 술에 취해 있는 방어사 김익순을 결박하고 투항을 받아낸 것이다.(참고 문헌 안동 김씨 문헌록)

김익순은 그로 인해 조정으로부터 처형을 당하고 조모 전주 이씨는 광주의 관비로 가고, 부친은 남해로 귀향을 갔다.

김병연은 형 병하와 함께 노복(머슴) 김성수의 등에 업혀 황해도 곡산으로 피신하고 모친은 아기 병호(김병연의 동생, 셋째) 데리고 경기도 여주 이천으로 피신하였다.

후일에 조부(김익순)의 죄가 멸족에서 폐족으로 감형되어 형제는 모친에게로 돌아갔다.

(일가족 모두 죽이는 멸족과는 달리 폐족은 가족들이 벼슬을 할 수 없는 형벌이었다)

부친은 귀향 중에 홧병으로 죽었다.

세인의 괄시와 천대가 심하자 모친은 가족을 이끌고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삼옥리로 이주하여 살았다.

병연은 20세 때 한 살 연상인 장수 황 씨와 결혼했다.

1827년(순조 27년) 영월 동현에서 실시한 백일장에서 시제 "논정가산충절사탄 김익순 죄통우천"에 대하여 가산 군수 정 씨를 예찬하고 선친 부사이자 방어사였던 조부 김익순을 비판하는 글을 지어 장원을 하였다.

이 날의 시험 문제가 자신의 할아버지인 김익순의 죄에 대해 논하라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 일이라 자신의 조부가 김익순인 것을 몰랐던 그는 "한번 죽은 것으로는 부족하니 만 번은 죽어야 마땅하다"라는 비판하는 내용의 글이었다.

후일에 급제 후 뒤늦게 모친으로부터 집안 내력을 듣고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감에 빠져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어둔으로 옮겨 은둔생활을 하면서, 그의 나이 22세 때 아들 학균을 낳고 그 뒤에 상경하여 이름을 김란, 자를 이명, 호를 지상으로 바꾸고 안 응수의 문객으로 들어가 공부를 시작하였다.

24세가 되던 해 권문에 기대어 출세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와 형 병하에게 아들 학균을 입양시키고 그해 차남 익균을 얻었지만 처자식을 남겨둔 채 방랑길에 올랐다.

그때부터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고 자책하며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고 다녔기에 김삿갓 또는 김립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는 방랑 길을 떠나면서 어머니와 처에게는 홍성의 외가에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정반대 북쪽의 금강산으로 첫 방랑 길을 떠났다.

방랑 중이던 29세 때에는 가련이라는 기녀와 동거를 했다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한때는 잠시 집에 들렀던 것을 제외하고는 가족들과 연락을 끊고 방랑하면서 그의 아들 김 익균을 세 차례 정도 귀가를 권유받기도 했지만 거절하고 방랑을 계속했다.

그 후에 마지막 방문지인 전라남도 화순군 동북면에 들렀던 중 1863년(철종 14년) 안 참봉의 사랑방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57세, 그곳 마을 뒤편에 묻혔다.

그로부터 3년 후에 부친의 행방을 찾아 헤매던 둘째 아들 익균은 유골을 수습하여 강원도 영월 하동면 노루목으로 이장을 하였다

김삿갓 주거지 복원한 집

김삿갓 주거지 전경, 2002년 9월에 복원한 모습

옛날 뒷간(화장실)

웃으며 창공 우러르면 이로 인해 초탈할 수 있지만

세상길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다시금 아득해지나니

가난하게 산다고 매양 집사람에게 핀잔을 받았고

마구 퍼마셔서 술집 여인들 조롱도 많이 당했네

세상만사를 꽃이 흩날리는 한낮인 듯이 간주하여

일생토록 밝은 달 비치는 밤은 차지할 수 있었네

응당 일신이 일삼는 업이 이것일 뿐이어서

청운의 꿈이 분수 밖 멀리 있음을 차츰 깨달았네.

난고 김삿갓 문학관

김삿갓 유적지를 둘러보고 문학관으로 왔다.

관람료 이 천 원에 표를 구입하고 내부로 들어갔다

어디를 가도 문학관은 거기서 거기였다.

단지 방랑 시인 김삿갓(김병연)은 방랑 시인으로 살다가 가기에 그의 시는 삶의 애환이 스며들어 있는 것을 느꼈다.

방랑 시인 김삿갓이 팔도강산 돌아다니면 머물렀던 곳

문학관 내 조형물

김삿갓 문학관 내부를 보고 나와서 주변에 조형물과 비석에 많은 글귀들을 읽어보았다.

많은 글귀는 김삿갓 문화축제에 입상한 작품이었다.

김삿갓 유적지, 문학관을 보고 풍기로 가기로 하고 폰 네비에 위치를 입력하고 안내하는 대로 따라갔다

처음은 잘 간다고 했는데, 갑자기 비포장도로가 나오고 좁은 산길로 안내를 하다가 통신장애로 끊겼다.

깊은 산속 도로는 좁고 다시 돌아갈 수는 없고 해서 무작정 산길을 계속 올라갔다.

전파도 잡히지 않고 더욱이 내 차가 20년이 넘은 차라서 고장 나면 깊은 산속에 갇히는 신세가 될까 불안한 생각이 자꾸 들었다.

비포장도로가 있다가 다시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왔다.

한참을 올라가니까 고치령이라는 표지석이 나왔고, 고갯길을 올라오면서 차가 열을 많이 받았지 하는 생각에 고치령에서 잠시 쉬고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한참을 내려오니까 마을이 있고 큰 길이 나왔다.

아스팔트 포장도로에 와서 폰 내비에 위치를 입력하니까 전파가 잡혔다.

이젠 됐다, 그때 불안한 마음이 사라졌다

고치령 고개를 넘어오면서 얼마나 불안했는지......

그렇게 맘 고생을 하고 풍기에 도착했다.

풍기는 나의 고향이지만 아는 사람 아무도 없지만 잠시 구경하고 대구로 출발했다

고치령 표지석

방랑시인 김삿갓

작사: 김문응

적곡: 전오승

노래: 명국환

발매일: 1955년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흰구름 뜬 고개 넘어 가는 객이 누구냐

열두 대문 문간 방에 걸식을 하며

술 한잔에 시 한수로 떠나가는 김삿갓

세상이 싫던가요 벼슬도 버리고

기다리는 사람없는 이 거리 저 마을로.

손을 젖는 집집마다 소문을 놓고

푸대접에 껄껄대며 떠나가는 김삿갓

방랑에 지치었나 사랑에 지치었나

개나리 봇짐지고 가는곳이 어데냐

팔도 강산 타향살이 몇몇해던가

석양지는 산마루에 잠을 자는 김삿갓

이 노래는 일본 노래를 표절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1965년에 금지곡으로 지정된다

1984년에는 공식적으로 금지된 이 곡을 대신하기 위해 (김삿갓)이라 곡이 명국환의 노래로 발표됐다.

1987년 상당수의 금지곡이 해금될 때도 방랑시인 김삿갓은 표절곡이라는 이유로 대상에서 제외됐다.

[출처] 방랑 시인 김삿갓 유적지 및. 난고 김병연(김삿갓) 문화관 탐방|작성자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