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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석리[臥石里] 의 유래

영월🏕김삿갓부동산 2008. 6. 11. 23:18
와석리[臥石里, Waseok-ri] :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에 있는 리(里)이다. 어래산 끝나락에 자리한 농촌이다. 이곳은 사람이 편안히 누워서 자연을 벗삼아 어질게 살수 있는 살기 좋은 마을이라는 뜻에서 '와인리(臥人里)'라 하였으며 후에 와석리가 되었다. 자연부락으로는 두릉골, 와인리, 골어구, 든돌, 싸릿골, 노루목, 미사리, 골말, 젖동개, 조촌 등이 있다. 해발 1,063.6m의 어래산(御來山) 줄기로 강원도, 충청북도, 경상북도의 삼도가 접하는 접경 지역인 삼도봉이 있다.

와인리(臥仁里)

고지기재 밑에 있는 도일바위(屠日岩) 건너편인 두릉골, 들모랭이, 골어구 등을 '와인리'라 한다. 이곳은 사람이 편안히 누워서 자연을 벗삼아 어질게 살수 있는 살기 좋은 마을이라는 뜻에서 '와인리(臥人里)'라 하였다.


두릉골(杜陵谷)

와석송어장 뒤쪽의 높은 언덕(두릉) 위에 위치한 마을이므로 두릉골이라 한다. 한때는 10여 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2가구가 살고 있다. 오대본서구니(마당굼이)에 있는 산신당의 뒷재를 넘으면 김삿갓의 묘가 있는 노루목과 그의 집터가 있는 어둔(於屯), 선락동(仙樂洞)으로 가는 길이 있었다.


찬물나드리

고지기재 밑에 있는 도일바위(屠日岩)에서 두릉동으로 건너가는 개울물을 말한다. 이곳은 두릉골 옻물샘에서 흘러내리는 12℃정도의 찬 물이 흘러내리므로 이를 이용하여 송어를 키우는 와석송어장이 있다. 배를 타고 건너는 곳을 나루라고 하고, '나드리(나들)'란 무릎을 걷어올리고 건너는 곳'을 지칭한다. 이곳은 뼈가 시릴 정도의 차가운 시냇물이 굽어 도는 얕은 곳이므로 '찬물나드리'라 한다.


도일바위(屠日岩)

두릉동의 와석송어장 앞으로 흐르는 찬물나드리 건너편에 있는 바위이다. 1907년 일본에 의한 고종 황제 강제퇴위와 군대 해산으로 일어난 정미의병장(丁未義兵長)인 이강년, 김상태(金尙台) 의병장(하동면 옥동리 거주)이 거느리는 의병들이 도일바위(일본인들을 도륙한 바위)에서 찬물나드리를 건너오는 일본 헌병대 수십 명을 사살하고 고지기재를 넘어 밀골로 숨어 버렸다. 일본인들은 찬물나드리 위에 있는 경주 김씨 집성촌인 주실마을로 들어와 주민들이 의병들과 내통하였다 하여 마을을 불태우고 서당 훈장인 김성희(金性熙)의 귀와 팔을 자르고 김도희(道熙), 김치희(致熙), 김일희(日熙), 김교성(敎聲), 김정운(正雲) 등을 살육하였으므로 주실 마을은 같은 날(1907년 7월 26일, 음력) 제사를 지내는 집이 많았다.

김상태(金尙台) 의병장은 그 후에도 신출귀몰하는 작전으로 영월, 단양, 영주, 풍기 등지에서 일본 수비대를 격퇴시켰다. 1911년 6월 14일 소백산 기슭인 풍기군 단산면 광암리에서 현상금에 눈이 먼 심복 우중수(禹中守)의 제보로 영주 수비대장인 종편겸(宗片謙)에게 체포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단식 끝에 옥사하였다. 정부에서는 1963년 김상태 의병장에게 『건국 공로훈장』을 추서하였다. 하동면 옥동리에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순의사를 건립하였으나 없어지고 영월군에서 1993년 그 자리에 『순의비』를 세웠다.


아기장수 무덤

와석송어장 건너편 998번 지방도 밑에 있는 도일바위(屠日岩) 근처에 있다. 든돌에서 태어난 아기장수를 죽여 이곳에다 묻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가라치

고지기재를 지나는 998번 지방도가 개통되기 전에는 예밀리에서 가르대를 건넌 다음 가라치를 넘고 와석송어장이 있는 두릉동 앞의 찬물나드리를 지나서 와석리로 다녔다. '가라치'란 '갈라지는 길목' 또는 '산줄기가 나누어지는 곳(목)'을 말한다.


황새바위

와석리(와인리) 마을 뒷산에 있다. 산봉우리에 큰 암석이 마을 쪽으로 길게 뻗어있으므로 '황새바위'라 한다.


말구리재

가치산의 7부 능선에 있는 고개로 예전에 와석리에서 옥동 쪽으로 가는 사람들은 이 길을 이용하였다. 이 고개는 뼝대 사이로 난 좁고 험한 고갯길로 아래 쪽은 푸른 옥동천이 흐르는데 옛날 외룡리 용담에서 나온 용마가 주인 장수를 찾으며 울부짖다가 이곳에서 굴러 죽었으므로 '말구리재'라 한다는 전설도 있다. 그러나 '말구리재'란 말이 '말이구를 정도의 험하고 위험한 고개'를 의미하는 뜻이다.


도깨비 밭

옛날 들모랭이에서 행인들을 상대로 주막을 하는 과부가 있었는데 그 과부는 얼굴이 예쁘고 행실도 밝아서 뭇사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늙은 홀아비 도깨비가 이 여자가 마음에 들어 사람으로 변하여 찾아와서 자기와 결혼을 해주면 한 가지 소원을 꼭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이 때만 해도 들모랭이는 수풀이 우거진 못쓰는 벌판이었으므로 밭으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였더니 하루아침에 그 넓은 땅이 옥토(玉土)로 변하였다.

그후부터 밤만 되면 도깨비가 나타나 결혼을 하자고 못살게 굴었다. 이 과부는 큰 백말을 잡은 뒤 그 피를 집 주위에다 소금과 함께 뿌렸더니 그후부터 도깨비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들모랭이 말무덤

옛날 든돌(擧石里)에 사는 늙은 부부가 자식을 얻기 위하여 100일 치성을 드린 후에 아들을 낳았다. 이 애기의 겨드랑이에는 날개가 달려 있고 태어난지 사흘만에 실강에 올라가 놀고 하였다. 이 아기장수가 장차 나라의 큰 역적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죽인 다음 고지기재 밑 도일바위 근처에 묻었다. 이 아기장수가 죽은지 며칠 후에 이웃 마을인 외룡리의 용담(龍潭)에서 용마(龍馬)가 나와 사흘 동안이나 울부짖다가 죽었다.

그 무덤을 용마무덤이라 하여 와석리(옛 지명 와인리)의 들모랭이에 묻었다. 그 후 주민들은 이 무덤에 매년 용마제를 지냈으며 병자년 홍수 때 유실된 것을 동민들이 복구를 했으나 1972년 수해 때 묘가 없어졌다. 장수가 태어난 든돌에는 지금도 장수터라는 곳이 있다.


골어구(谷口)

와석분교 동쪽에 있다. 충북(忠北) 단양군 영춘면(永春面) 의풍리(儀豊里)와 경상북도 영풍군(榮豊郡) 부석면(浮石面) 남대리(南大里)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이 김삿갓의 생가가 있었던 어둔 선락동(仙樂洞) 계곡과 합류하여 이곳 골 어구로 흘러내린다. 주위의 경관이 수려하고 기암절벽 사이로 흐르는 맑은 물이 이곳에서는 양 갈래로 흐르는데 여름 한철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든돌로 가는 골짜기 입구이므로 '골어구'라 한다.


든돌(거석리. 擧石里)

와석분교 뒤쪽에서 김삿갓 묘가 있는 노루목으로 가는 골어귀와 싸리골(쌀골)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든돌에서 태어난 아기장수가 힘 자랑을 하기 위해 집채만한 바위를 들어서 작은바위 위에다 올려놓았으므로 '든돌' 또는 '든바우'라는 지명이 생겼다. 그 후 순수한 우리말 땅이름인 든돌이 한자식 표기법인 '거석리'로 변하였으며 난리가 있을때는 마을사람들이 이 바위 밑에서 피난도 했으나 그동안 수차례의 수해와 도로공사로 많이 묻혔다.


봉우재

와인리의 골어구에서 든돌로 가는 도로 우측에 있다. 예전에 이곳에서 봉화를 올렸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봉우재'란 '산봉우리에 난 고개'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인 것 같다.


장수터

든돌교(擧石橋) 서쪽으로, 옛날 자식이 없는 부부가 치성을 드린 후 장수를 낳았던 곳이므로 '장수터'라 부르고 있다. 외룡리의 용담에서는 용마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절양지(寺陽地)

박달골 끝자락의 양지 바른 언덕 위에 있다. 전에 절(寺)이 있었으므로 '절양지'라 한다. 지금은 서울 사람의 별장의 들어섰는데 집터가 세다고 한다. 일명 절골 이라고도 한다. 이 절의 재목은 보덕사를 지을 때 모두 옮겨갔다고 한다.


칠칠바위

싸리골에 사는 어떤 사람이 밤늦게 마실을 다녀오다가 호랑이에게 물려갔다. 이 얘기를 들은 사람들이 솔가지불을 해들고 찾아보니 너럭바위에서 사람을 뜯어먹고 있었는데 피가 철철 흐르므로 이때부터 '칠칠바위'라 불렀다고 한다.


싸리골(미동, 米洞)

각시소 위쪽에 있다. 거석리(든돌, 擧石里)에서는 유일하게 20여 마지기의 논이 있어 쌀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골짜기이므로 '쌀골'이라고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싸리골'로 변하였다. 이곳은 높은 산악 지대 분지로 지형상 찬 공기가 쌓여 냉기류를 형성하는 지형임에도 불구하고 찬 공기가 불어오지 않아 농사가 잘되고 가축이 잘 자라는 마을이다. 한때는 10여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두 가구가 살고 있다.

이곳 역시 조선시대 정감록(鄭鑑錄)에 심취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피난하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십승지(十勝地)를 찾아왔으며 십승지는 어지러운 세상에 난을 피할 수 있으며 흉년 또한 들지 않는 곳으로 곡식의 종자를 양백(陽白)에서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들이 찾는 십승지는 『寧越正東上流 可臧亂踪 無髮者先入則否, 영월 정동쪽 상류로 어지러운 세상에 종적을 감출 만한 곳이나 수염 없는 자가 먼저 들어오면 안된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지금도 이곳에는 서울대 지리학과 최창조(崔昌祚)교수가 일년에 몇 번씩 찾아 와서 김기천 씨 집에 묵으면서 하동면 일대의 풍수지리를 연구하여 T.V에 소개하기도 한다.


대밭나드리

곡골에서 김삿갓묘가 있는 노루목으로 가는 계곡 우측에 있다. 이곳은 야트막한 산자락으로 흰 눈이 쌓인 겨울철에도 늘 푸른 산죽(山竹)밭과 실개천이 있는 곳으로 '대밭나드리' 라고 한다. 옛날부터 산죽이 나는 곳은 명당이라는 얘기가 있다.


노루목

싸리골에서 곡골, 대밭나드리를 지나 와석리와 충북 단양군 영춘면의풍리(義豊里)와 경계가 되는 마을이다. 지금도 노루목에 사는 아이들은 매일 40분 이상씩 걸어서 충북 땅인 의풍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널 노루목에서 의풍 노루목으로 넘어가는 산마루 정상에 바위 두 개가 노루뿔처럼 솟아 있으므로 이 마을의 이름을 '노루목'이라고 한다. 경치가 아름답고 살기 좋은 산촌(山村)으로 어둔 입구에 있는 시선(詩仙) 난고(蘭皐) 김삿갓의 묘는 박용국 선생(영월 향토사 연구가)이 찾아내 성역화 하였다.


김삿갓 묘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에 있다. 마대산 줄기가 버드나무 가지처럼 흘러내리는 유지앵소형(柳枝鶯巢形)의 명당으로 태백산과 소백산이 이어지는 양백지간(兩白之間)에 자리잡고 있다. 마대산 자락인 어둔과 선락동에서 흐르는 냇물을 경계로 충북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남·동쪽으로는 널노루목의 풍요로운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시선(詩仙) 난고(蘭皐) 김삿갓의 묘는 버드나무 가지에 지은 꾀꼬리집 형상의 명당으로 안동 김씨(安東 金氏) 대종회 휴암공파 회장인 김천한(金天漢)씨가 비석을 세우고 매년 10월 1일 후손들이 찾아와 시제를 지내고 있다.


어둔(於屯)

김삿갓의 묘가 있는 노루목 성황당에서 서북쪽으로 30분쯤 들어가면 김삿갓이 살던 집터가 있었던 곳이다. 어둔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마대산에서 흐르는 계곡 사이로 좁은 돌길이 나 있는데, 그 우측은 선락동(仙樂洞)이고 좌측으로 가면 김삿갓이 살던 집터가 나온다. 어둔에는 지금 산(山)공부를 하는 젊은 여자가 혼자 살고 있다. 이곳은 태백산(太白山)과 소백산(小白山)의 양백간(兩白間)으로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의 3도 접경 지역이다.

조선 명종 때 풍수(風水), 천문(天文)에 도통한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도 의풍(儀豊)을 가리켜 피장처(避藏處)로서 천하에 둘도 없는 명당이라고 극찬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좁은 골짜기로 해가 일찍 지고 어두운 곳이므로 '어둔'이라 불렀다고 한다.


미사리(未死里)

와석리 골 어구와 와석 주유소를 지나 와석분교로 들어가는 골짜기이다. 조선말 정감록(鄭鑑錄)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난리를 피할 수 있고, 흉년이 들지 않아 능히 생명을 보존할 수 있다는 십승지(十勝地)중의 한 곳인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 이름을 미사리(未死里, 죽지않는 곳)라 하였다.

십승지는 풍기 차암 금계촌, 봉화 동쪽인 청양현, 충북 보은 속리산, 운봉의 행촌, 예천 금당실, 공주 계룡산 유구, 마곡 부안의 금바위, 합천 가야산 만수동 등이다. 특히 조선시대 한양 조씨들이 임진왜란을 피하여 집안을 이끌고 미사리에 은거하였는데 그곳은 지금도 조촌(趙村)이라 하고 그 윗동네를 명생동(命生洞)이라고 한다. 조촌의 입향 시조인 조홍필의 무덤은 지금도 진별리 베리골의 양주터에 있다. 그 당시는 주로 경상도 사람들의 십승지 가운데 『七日 寧越正東上流 可藏亂踪 無髮者先入則否, 일곱 째의 승지는 영월 정동쪽 상류이니 어지러운 세상에 종적을 감출만한 곳이나 수염이 없는 자가 먼저 들어오면 틀릴 것이다.』라는 말을 믿고서 명당인 이곳을 찾아와서 자리를 잡았다. 그 후에도 나라가 어지러울 때 평안도 함경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난리를 피하여 찾아든 곳이다. 이곳 십승지는 1993년 11월에 방영한 K.B.S 1T.V『향토기행』이란 프로에서 필자가 소개하기도 하였다.


퐁퐁소

미사리에서 조촌으로 가는 열재 입구에 있는 소(沼)이다. '퐁퐁소' 위에는 2m 높이의 작은 폭포가 있는데 물 떨어지는 소리가 퐁퐁거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도둑바위

미사리 입구에서 실개천을 따라 약 1.5km쯤 올라가다가 도로 우측에 있는 큰 바위이다. 길이 험하고 바위 밑으로 맑고 찬 계곡이 흘러 여름 한철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예전에 이 바위 밑에서 도적이 길 가는 행인의 물건을 빼앗았으므로 '도둑바위'라 불렀다. 그 뒤에는 현재 작은 절을 짓고 있다.


절골

조촌 동남쪽인 주석분교 건너편에 있다. 옛날 절이 있었던 곳으로 지금도 절터에는 기왓장과 아름드리의 은행나무 뿌리가 발견된다. 예전에 큰 절집이 있었는데 빈대가 많이 생겨 스님들이 불태워버렸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골말

조촌의 와석분교 북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한 때는 대여섯 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조씨성을 가진 1가구가 살고 있다.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므로 '골마을→골말'이라고 하며, 이곳의 물은 조촌의 식수로 이용된다. 마을 어귀에 큰 너래반석과 돌서덕이 많이 널려 있다.


젖동개(檜洞)

명생동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뒤에 있는 강원, 충북, 경북 삼도의 경계인 어래산(御來山, 1,063.6m)을 넘으면 충북 의풍리의 어은과 경북 부석면 남대리로 갈 수 있다. 즉 강원, 충청, 경상도의 접경으로 전나무(檜木)가 많았으므로 '전동개→젖동개(檜洞)'라고 한다. 일설에는 경계 지역의 마을이므로 '저쪽동네→저동네→젖동개'라는 지명이 붙었다는 얘기도 있으나 잘못된 주장이다.

의풍에서 고치골을 지나 10리쯤 가면 경북과 경계인 영풍군 단산면 마락리 섶밭 마을로 태백산과 소백산이 만나는 곳이다 이곳 고치령 마루턱에 있는 당집에는 태백산 신령인 단종과 소백산 신령이 되었다는 금성대군의 영정을 함께 모시고 있다. 태백산 자락에 지리한 중동면 녹전 서낭당의 단종 영정 앞에는 매년 주민들이 소 한 마리를 바쳐서 당고사를 지냈듯이, 소백산 두레골(경북 영풍군 단산면 단곡리)에는 산신당(山神堂)이 있고 그 위에는 금성대군(錦城大君)을 모시는 上堂이 있다.

상당에는 순흥에서 유배생활 중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꾸몄던 단종 복위계획이 탄로 나자 죽음을 당한 금성대군의 피묻은 신석(神石)을 모시고 있다. 원래 이 신석은 순흥면 죽동 서낭당에 모시고 순흥사람들이 소를 잡아 당고사를 올렸으나, 구한말 소백산을 중심으로 의병들의 활동이 격렬해지자 일본 헌병들이 순흥에 주둔하면서 마을과 서낭당에 대한 횡포가 심해지면서 이곳 두레골로 옮겼다.

지금도 두레골 사람들은 당고사를 며칠 앞두고 풍기 우시장으로 가서 제물로 바치는 황소를 사서 『謹封』이라 쓴 한지를 머리에 씌우고 양반님(소)을 모시고 온다. 두레골로 옮겨진 소는 제관으로 뽑힌 사람으로부터 아침 저녁으로 문안인사(큰절)를 받으며 며칠간 호강을 누린다. 정월 열 나흘에는 산신당에 새앙(솔째로 바치는 메)을 올리고 황소의 지레, 간, 염통 등은 上堂인 금성대군에게 바치고 나머지는 산신당으로 옮겨서 당고사를 지낸다.

이튿날 정월 대보름에는 子時를 기해 본고사를 올린다. 지금도 당고사에 쓰인 고기와 음식은 마을 사람들 모두가 초헌관집에 모여 화합의 큰 잔치가 벌어질 때 쓰인다.


삼도봉(三道峯)

해발 1,063.6m의 어래산(御來山) 줄기로 강원도, 충청북도, 경상북도의 삼도가 접하는 접경 지역이므로 '삼도봉'이라 한다. 이곳 삼도봉 밑에 있는 충북 단양군 의풍면의 의풍초등학교는 지금도 강원도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에 사는 학생과 경북 부석면 남대리 학생들이 함께 공부하며 가을 운동회 때는 삼도(三道) 주민들이 함께 어울린다.


조촌(趙村)

와석분교가 있는 마을로 임진왜란 이후에 한양 조씨 후손들이 그 집안을 이끌고 십승지(十勝地)의 하나인 이곳에 와서 마을을 개척했으므로 '조촌'이라고 한다. 이곳에 처음 들어온 입향 시조인 조흥필(1707∼1777년)은 진별리 베리골에 부인 인동 장씨와 함께 묻혔는데 그 묘를 가리켜 '양주터'라 부르고 있다. 이곳은 대다수가 한양 조씨로 한때는 40여 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여덟 가구가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