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의 시들은 유유자적한 귀족적인 시작(詩作)의 태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 본연의 서정과 빈궁한 평민들의
생활상에 시야를 돌립니다. 이로써 한시의 평민화 경향을 더욱 발전시켜 민중적인 차원으로까지 확대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시 표기에 있어서의 파격은 권위주의로서의 한시 영역을 붕괴시키고 골계미와 해학미라는 새로운
미학으로 한시의 지평을 넓혔습니다.
- 이 형식의 파괴는 한글혼용, 순 한글시의 형태로 나타났으며 한글의 사용은 이후 현대 문학 조류의 시작인 개화기 문학의
경항과 비추어 볼 때 한글시를 짓는 단초를 열어 준 것입니다. 이러한 형식의 파괴는 그의 40여편의 희작시에서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김삿갓 시의 백미는 바로 해학성과 풍자성에 있는데 잘난 척하는 촌부(村富)나 훈장에게 특휴의 야유와 곡설(曲設)로
풍자하고 힘없는 노인과 부녀자에 대해서는 동정적인 입장에서 바라보았습니다. 김삿갓 시의 풍자성과 해학성은 새로운
삶의 형식이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풍자는 대상에 대한 부정으로써 악덕하고 부조리한
인간과 사회에 대한 부정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해학은 대상에 대한 긍정으로써 따뜻한 인간애를 가진 인간과 인정이
넘치는 사회에 대한 긍정이었습니다.
김삿갓의 삶의 형식은 바로 악덕하고 부조리한 인간과 사회에 대한 부정이면서 따뜻한 인간애를 가진 인간과 사회에 대한
긍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 김삿갓의 방랑을 개인적 좌절의 표현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것은 김삿갓 혼자만의 좌절은 아니었을 겁니다. 시대적
배경에서도 알 수 있듯 봉건신분사회를 살았던 대다수의 피지배층과 몰락 양반들의 삶이 그러한 좌절의 삶이였습니다.
김삿갓은 민중의 생활과 일상을 기반으로 한 소재로 구체적인 민중의 삶을 노래하였고 그의 시는 양반은 물론 여염집
아낙이나 동네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향유되었습니다. 김삿갓의 이름이 문헌에서보다 입을 통해 전해질 수
있었던 것도 방랑생활 속에서 민중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가 지은 소제시(訴題詩 : 힘없고 못 배운 백성의 권리를 찾아주기 위해 그들의 대신하여 관가에 제출한 일종의
소송장)를 통해 그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묘쟁(墓爭 : 묘터를 빼앗은 양반사대부가를 비판), 독가소제(犢
價訴題 : 빈한한 농가의 송아지를 죽인 소송), 산소소장(山所訴狀 : 다른 사람의 선산에 조상의 묘를 무단으로 쓴 데 대한
소송) 등의 시가 이에 해당합니다.- 김삿갓은 조상에 대한 부끄러움, 막힌 출세길 때문에 평생 한을 품고 살았으며 그 한은 시로써 표출되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이상과 현실의 대립은 자아인식의 대상이 되었고 나아가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발현되었습니다. 즉 끝없는
방랑을 통한 자기 인식이 현실인식으로 발전되었으며 이것이 그의 시로써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방랑을 멈추지
않았던 것도 스스로의 존재인식을 이를 통하여 찾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 김삿갓은 조상에 대한 부끄러움, 막힌 출세길 때문에 평생 한을 품고 살았으며 그 한은 시로써 표출되었습니다. 이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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