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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고 김병연 탄생 200주년 『제10회 난고 김삿갓 문화큰잔치』

영월🏕김삿갓부동산 2007. 9. 14. 10:14
난고 김병연 탄생 200주년 『제10회 난고 김삿갓 문화큰잔치』 행사일정 첫째날(9월14일 금요일) 둘째날(9월15일 토요일) 셋째날(9월16일 일요일) 전시행사(9월14일~9월16일) 부대행사(9월15일~9월16일) 축제하이라이트 김삿갓 콘테스트「나도 김삿갓!」 전통 한시백일장 시현 가을밤 추억음악회 마대산 등반행사 공예체험 행사 참가신청 : 김삿갓 만화그리기대회 요강 및 참가신청 학생백일장대회 요강 및 참가신청서 전국 휘호대회 요강 및 참가신청 김삿갓 콘테스트『나도 김삿갓!』요강 및 참가신청





방랑시인 김삿갓

김삿갓 (본명 김병연)


방랑시인 김삿갓 - 명국환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흰 구름 뜬 고개 넘어 가는 객이 누구냐
열두 대문 문간방에 걸식을 하며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 떠나가는 김삿갓



2
세상이 싫든가요 벼슬도 버리고
기다린 사람 없는 이 거리 저 마을로
손을 젖는 집집마다 소문을 놓고
푸대접에 껄껄대며 떠나가는 김삿갓.



삿갓시인 김병연의묘

3
사람에 지치었나 사랑에 지치었나
괴나리 봇짐 지고 가는 곳이 어데냐
팔도강산 타향살이 몇 몇 해던가
석양 지는 산마루에 잠을 자는 김삿갓.


김삿갓의 작품에 대하여...

김삿갓은 국문학사에 있어서 특이하면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방랑시인이자 풍자시인이다. 또한 김삿갓처럼 전설화되고 많은 사람들에 의해 희자된 시인은 거의 없다 할 수 있다.

그의 시세계는 해학과 풍자,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불만과 비판으로 가득차 있다. 이러한 점은 그의 호방하면서도 소탈한 성격, 번뜩이는 기지와 결합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독특한 시세계를 이루게 하였다.

김삿갓은 그의 시가에서 당대의 암울한 현실에서 자기의 기개와 재능을 펼칠 수 없게 된 데 대한 비분강개의 정을 토로하고 불합리와 모순으로 충만한 세상에 대한 불평과 반감을 보여 주었다. 일련의 역사적 재제의 영사시편들과 우감자탄시(偶感自嘆詩)들은 이를 보여준다.

김삿갓은 대체로 청년시기에 중국고대의 '전국책', '연책', '사기' 등에서 취재하여 "섭정이 있은 후 이백년만에 진나라에 형가의 일이 있었다", "역수가의 작자는 장사이며 시인", "초나라는 굴원으로 울었다", "항우가 죽은 후 고제도 늙어 죽었다" 등 낭만주의적 경향의 많은 영사시를 썼다.

청년시기의 이러한 낭만주의 시편들에서 그는 굴원, 형가, 항우 등 고대의 이름난 충신, 영웅걸사들의 사적을 회고하면서 그에 기탁하여 당시의 혼탁한 세상에서 장한 뜻을 펼 수 없고 재능을 발휘할 수 없는 자신의 울분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그의 이러한 비분강개의 정은 장기간의 방랑과정에, 특히 그 만년에 쓴 많은 우감자탄시들에서 더욱 강렬한 낭만적 색조를 띠고 표현되고 있다. 여러 종류의 '자탄', '자영', 시들, '난고평생시', 그리고 '고향생각', '넓은 여울을 지나며', '삿갓을 읊노라' 등은 그 주요작품들이다.

시 '자탄'에서 시인은 거문고와 책을 벗삼아 보낸 40년, 불공평한 세상에서 청운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평초처럼 삼천리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닌 자신의 불우한 처지에 대한 개탄과 자기 위안의 심경을 토로하였다.

그리고 그의 유명한 '난고평생시'는 시인의 한많은 한평생을 자서전적으로 노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시에는 죽장망혜로 풍월행장의 빈주머니 하나 들고 박정한 세상의 온갖 학대와 모멸을 당하며 온 나라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닌 한평생의 기박한 운명이 여실히 그려져 있으며 또한 그러한 역경 속에서 체험한 시인의 끝없는 한, 고독과 울분의 심경이 그대로 토로되고 있는 것이다.

김삿갓은 일생의 방랑과정에 사회 각 계층 인간들과 접촉하고 그들의 생활속에 깊이 침투하면서 양반과 평민, 부자와 빈자, 강자와 약자 - 이 서로 대립되는 판이한 두 세계를 점차 발견하였으며 그들의 상이한 생활현실을 주의 깊게 통찰하고 이해하였다. 따라서 그의 시가에는 이 대립되는 두 세계의 인간들의 생활과 정신적 세계가 여실히 반영되어 있다.

김삿갓은 우선 그의 많은 풍자시에서 양반들의 무위기생하는 기생충적 생활, 그들의 온갖 추태와 말기적 현상들을 기발한 풍자적 수법으로써 무자비하게 폭로비판하였다. '양반을 시비함', '온종일 머리를 수그리고 있던 나그네', '양반의 아들을 조롱함', '원생원', '농시', '훈장', '훈장을 훈계함' 등이 그러한 시들이다.

파격시 '양반을 시비함'에서 시인은 양반이라는 사족의 칭호에 의해 행세하고 뽐내며 세도 쓰는 자들을 사회적으로 아무 쓸모없는 가소로운 존재로 낙인하고 그들의 신분적 존엄을 완전히 부정하였으며 여지없이 풍자조소하였다.

그의 다른 풍자시 '온종일 머리를 수그리고 있던 나그네'에서는 양반들의 출세욕과 아첨, 허장성세를 풍자적 과정과 예리화의 수법으로 타메조소하였다. 이 시에서는 여름날에 당나라 가죽신에 두툼한 송나라식 버선을 신고 땅에 끌리는 두루마기를 입고 하늘을 가릴듯한 당나라식 부채를 들고서 새벽에 집을 나와 날 저물러서야 돌아가며 한두 권의 시서나 겨우 읽고서 시율이 어떠니 하고 뇌까리며 천금을 다 쓰고도 모자란다고 떠드는 양반행세객들의 거드럼과 방탕, 권세가 문앞에서 온종일 머리 숙여 굴종하다가도 시골서 고향사람이 오기만 하면 천하에 자기밖에 없노라 뽐내는 양반들의 출세욕과 아첨, 탐욕과 허장성세 등을 가차없이 폭로하고 날카롭게 풍자 조소하였다.

'양반아들을 조롱함'에서는 무서워할 주제에 글이나 읽는다고 뽐내는 양반자식들을 갓낳은 '원숭이새끼'로, 황혼에 연못에서 와글거리는 '개구리떼'로 조롱하였으며 민간에 널리 알려진 '원생원'과 '농시' 등 풍자시에서는 한자의 동음이어를 우리말의 표현에 재치있게 이용하여 양반토호들을 원숭이, 모기, 벼룩, 쥐, 파리, 까마귀 등에 비유하여 사회의 기생충적 존재로 낙인하였다.

이러한 풍자시들의 예봉은 직접적으로는 지방의 양반, 선비, 토호 등의 계층에 돌려졌지만 그것은 기실 사멸되어 가는 양반사회 전반에 걸친 존재들에 대한 증오와 풍자조소와 타매였던 것이다.

그밖에 '개성', '강좌수가 객을 쫓아내다', '인심도 박절하다', '자탄', '스무나무 아래서' 등의 시에서는 방랑의 여로에서 하룻밤의 숙식도 거절당하며 학대와 수모를 당하는 시인 자신의 구걸생활의 쓰라린 회포를 해학적으로 표현하면서 양반부호계층 인간들의 극단한 인색과 몰인정, 야박한 세상인심을 쓰다쓴 웃음속에 풍자하였다.

김삿갓은 이같이 양반 귀족사회의 온갖 말기적 부패상을 폭로 풍자하고 당시의 야박한 세상 인심을 풍유, 비판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많은 시작품들속에서 지배계층의 착취 밑에서 고통받는 민중들의 운명을 동정하고 그들의 불평의 목소리도 대변하였다.

'비를 만나 촌집에서 자고서', '농가에서 자고서', '가난한 집', '무제', '노상에서 걸인의 시체를 보고' 등은 이 부류에 속하는 주요 작품들이다.

시 '비를 만나 촌집에서 자고서'에서 시인은 당시 농가의 쪼달리는 살림을 재현하였다. 다리를 펼 수 없는 정도로 좁은데다 쥐구멍으로 연기가 나서 그슬고 쑥창을 짚으로 막은, 어둠컴컴한 오막살이에서 하룻밤을 지내면서도 집주인에게 그래도 의관만은 비에 젖지 않게 되었다고 사의를 표시하는 등 시에는 가난한 농민의 가식없는 후의에 감사하는 뜨거운 감정이 흐르고 있다.

시인은 '가난한 집'에서라는 시에서 반찬이란 고기 한 점 없는 나물뿐이고 땔나무도 없어 울타리를 뽑아 때며 밥그릇도 없어서 며느리가 시어머니하고 한그릇을 같이 써야 하며 심지어 입을 옷 조차 없어서 부자 간에 서로 바꿔 입고 나들이 할 수 밖에 없는 가난한 생활 형편을 매우 진실하게 그렸다.

시인은 '노상에서 걸인의 시체를 보고'에서 노상에 쓰러진 한 걸인의 비참한 정경을 여실히 보여주면서 아주 절절한 동정을 보내고 있다. 보잘것없은 ㅉ은 지팡이와 쌀 두어 되를 세상에 남기고 길가에 쓰러진 걸인의 시체에 파리떼만 달려들고 까마귀만 그의 혼을 조상하는 누구도 돌보지 않는 걸인의 가련한 신세를 그리면서 김립은 '한 삼태 흙을 가져다가 이 시체에 풍상이나 가려주라'고 하면서 최하층 민중들에 대한 깊은 동정을 표시하였다.

김삿갓은 가난한 민중들을 동정만 한 것이 아니라 '가난을 비난함', '가난한 사람' 등의 시에서는 빈부의 차이로 인한 불합리한 사회를 비판하면서 미래 사회에 대한 자기의 이상을 제시하였다.

'가난을 비난함'이라는 시에서 가난이 곧 죄가 되는 당대 사회의 불합리를 비판하면서 빈부의 차 별이란 결코 하늘이 준 운명이 아니요, 사람의 처지란 변할 수 있는 것으로서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다같은 하늘아래의 인간이라는 인간평 등의 소박한 이념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가난한 사람'에서는 산간벽촌에서 쓸쓸히 살아가는 가난한 농민들에 대한 깊은 동정과 함께 그들의 행복한 삶을 열망하였다.

김삿갓은 그의 시가에서 이조말의 근대적인 사회경제적 동향과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이 백성들에 게 미친 영향을 반영한 작품들도 썼는데 '대동난'과 같은 시는 대동미법으로 하여 더욱 심한 화난을 당하게 된 백성들의 고통을 보여주고 그들의 불평의 목소리를 대변하였으며 또한 '돈'과 같은 시에서는 천하를 주유하며 나라도 집도 흥성케하고 산 사람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는 화폐의 경제적 위력과 사회생활에 미친 영향을 보여주고 있으며 황금만능의 새로운 경제적 관계가 나타나기 시작하던 근대적인 경제적 동향을 민감하게 반영하였다.

김삿갓은 일생의 방랑과정에 조국의 명산대천과 자연풍물들을 민족적 긍지 가득 찬미한 서경시들을 써서 열렬한 향토애, 조국애의 감정을 노래하였다. 여러 종류의 '금강산시'들을 비롯하여 '묘향산', '구월산', '광한루에 올라', '부벽루', '안변에서 표연정에 올라', '넓은 여울을 지나며' 등은 그의 주요 작품이다.

이러한 서경시들은 시인의 자연에 대한 세련된 심미감과 섬세하고도 참신한 경물묘사의 우수한 예술적 재능을 보여주고 있다.

김삿갓은 조선말기 사회 각 계층의 인정세태, 남녀간의 애정윤리와 개성해방의 지향을 반영한 시들을 썼으며 기타 다양한 재제의 허다한 영물시와 동물시들을 썼다. 그는 실로 자기가 견문하고 체험한 모든 것을 시화할 줄 안 천재적인 시인이었다.

그는 인간들의 복잡다단한 사회생활, 변화무쌍한 자연계, 푸른하늘에 높이 날고 대지 위에 기어 다니는 크고 작은 모든 생명있는 물건들을 다 무심히 보지 않았으며 그것을 자기의 시창작의 세계에 끌어들였다.

그러나 김삿갓 시가의 주요한 묘사대상은 자기 시대 각 계층 인간들의 사회생활, 특히 양반과 평민, 부자와 빈자 - 이 대립된 계층들의 현실생활이었으며 그의 시가의 사상적 주류를 이룬 것은 바야흐로 무너져 가는 봉건적 통치제도를 고수하고 시대조류를 거슬러 나가는 양반사회의 온갖 추태에 대한 가차없는 폭로와 비판, 풍자와 조소하였으며 고통받는 하층민의 운명에 대한 다함없는 동정, 그들의 불평에 대한 공명과 지지였다.

그의 시는 중국 한시의 다양한 격식을 자유자재로 이용하면서도 그 언어가 참신하고 평이하며 필치가 자유분방할 뿐만 아니라 기발한 풍자와 해학적이어서 민중에게 친숙하였다.

그는 묘사대상의 본질적 특성을 보다 생동감있고 심각하게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비유, 비의(比擬), 과장, 상징 등에다 풍자적, 해학적 웃음의 결합을 시도하였다.

그는 양반사회의 모든 부패하고 가증스러운 존재에 대해서는 극도로 과장되고 예리화된 풍자적 수법으로써 무자비하게 폭로 조소하였다. 이러한 경우에 그 풍자는 낡고 부패한 사회세력들에 대한 비판과 결부되면서 독자로 하여금 금할 수 없는 쓰디쓴 웃음, 통쾌한 웃음을 터뜨리게 하였다.

재능있는 풍자시인으로서의 김삿갓 시가에서 웃음은 또한 사회의 비극적 현상들에 대한 묘사에서, 특히 하층민들의 눈물 겨운 생활처지에 대한 묘사에서도 나타났다. 이러한 경우에 웃음은 주로 백성의 비참한 처지와 운명에 대한 다함없는 동정, 뜨거운 연민의 정과 연결되고 있다.

여로에 지친 나그네-시인에게 멀건 죽 한 사발밖에 대접 못하는 농민의 어려운 처지를 목격하였을 때 오히려 그 죽사발 안에 거꾸로 비친 청산을 구경하는 것이 더 좋다고 하는 시인의 기발한 해학은 그 한 예이다.

김삿갓은 한자어에 우리말의 표현과 같은 특수한 작시기교로써 한시형식을 창조하였는 바 이것은 그의 시문학형식의 근대적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즉 율시, 절구, 고시 등 전래의 한시형식에 의거하면서도 그 언어와 율조 등을 당시 조선 사람들의 근대적인 미학적 기호에 맞게 창조적으로 이용할 줄 알았다.

그는 '스무나무 아래서', '원생원', '농시', 여러 종류의 소제시(訴題詩)들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한자의 음과 새김을 빌어 우리말(구두어)를 재치있게 표현하기도 하고 한시의 칠언 형식에 3·4(또는 2·5조)와 같은 조선의 민족적인 시가율조를 이용하기도 하였으며 4·4조에 의한 파격적인 한시형식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한자와 한글을 결합하는 시를 썼고 순수한 한글에 의한 언문시, 특히 해학적인 언문시를 쓰기도 하였다. 그의 파격적인 시형식들은 조선말기 민족시가 발전에서의 하나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었다.

김삿갓의 주요한 시들에 대한 이상의 개략적인 분석을 통하여 시인 김삿갓의 사상은 초기에는 자기의 청운의 뜻을 이루지 못한데로부터 오는 울분을 토로하였다면 방랑생활 과정에서 사회현상에 대한 인식이 점차 심화됨에 따라서 멸망에 직면하고 있으면서도 허장 성세하며 허례 허식에 빠진 양반사회를 신랄히 풍자조소하고 불합리한 사회현실을 폭로하고 비판하면서 양반의 천대를 받으며 추위와 굶주림에 허덕이는 기층민중들을 동정하는 데로 발전하였으며 더 나아가 빈부의 차이가 없는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그런 사회를 염원하는 데로 이를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삿갓의 시가는 그의 전설적인 생애와 함께 평민적이고 반봉건적인 사상, 기발한 풍자예술과 창 작기교등으로 하여 그의 생존 당시에서부터 민중속에서 민요처럼 널리 전파되고 애송되었다.

따라서 김삿갓은 조선말기의 가장 재능있는 민족적인 서정시인의 한사람이며 탁월한 풍자시인으로서 고전문학사의 마지막 시기를 빛나게 장식하였다.